어머니의 기억

한국 고양 윤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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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열 딸 부럽지 않은, 애교 많은 고등학생 아들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 품에서 잠들기 좋아하고 저와 떨어질 줄 몰랐던 아들이 어느새 제가 올려다볼 만큼 키가 컸습니다. 훌쩍 자란 아들을 보면 뿌듯하지만 제 도움을 필요로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저에게 이상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아들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자꾸 묻는 것입니다. 아들이 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올 때면 제 머리에는 기저귀를 차고 기어 오던 모습이 떠오르고, 아들이 제 옆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으면 누워서 옹알이하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아들, 기억나? 너 어렸을 때 엄마가 요리하고 있으면 다른 데 있다가도 꼭 엄마 옆으로 와서 놀았잖아.”

주방에서 물을 마시는 아들에게 묻고,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도 또 물어봅니다.

“너 어릴 적에 엄마가 피아노 치고 있으면 좋아하는 노래 들으니까 힘 난다고 좋아했었던 것 기억나?”

어느 날은 무릎을 꿇고 걸레로 방을 훔치고 있는데 아들이 저를 보더니 한마디 했습니다.

“엄마, 그렇게 청소하시면 나중에 관절 다 망가져요. 자세를 바꾸시는 게 좋아요.”

“고맙다, 아들. 이제 엄마 생각해줄 만큼 컸네? 옛날에는 엄마가 엎드려서 청소하고 있으면 엄마 등에 올라타서 청소하는 내내 업혀서 놀더니, 기억나지?”

결혼 후 처음으로 생명을 잉태한 경험은 저에게 놀라움과 감격 그리고 감사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순간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저는 아이를 품은 날을 시작으로 손에 늘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2권의 육아 일기에는 아이의 태동부터 첫돌까지 일어난 일과 소감이 세세히 적힌 것은 물론, 태어나 처음으로 깎아준 손발톱과 배냇머리 같은 것이 붙어 있습니다. 아이의 옹알이와 첫 웃음, 울음소리, 신나서 지르는 소리 등이 녹음된 10개의 테이프도 함께 보관되어 있지요.

기록을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고, 그 전에 아이가 사춘기 등 힘든 일을 겪게 되면 엄마 아빠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지를 깨달아 이겨 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

일기는 멈췄지만 그 뒤로도 아이의 모든 순간은 저의 두 눈과 마음속에 차곡차곡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달리 아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 듯합니다. 며칠 전,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고 담소를 나누다가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너 어릴 때 그 음식 엄청 좋아했는데 지금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정말 잘 먹었었는데 기억⋯ 안 나니?”

“⋯ 실은 기억이 잘 안 나요. 다른 것들도⋯.”

“⋯ 엄마는 네가 처음 태동한 것부터 태어나던 날, 자라면서 있었던 많은 일들이 모두 다 기억나는데, 왜 이 기억들은 엄마에게만 있는 걸까?”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왠지 저는 조금 섭섭했습니다.

조용히 생각에 잠기다 콧잔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들처럼 하늘에 있었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저 때문에 마음 아파하실 하늘 어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마주할 때마다 천상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함께 떠오르실 테지요. 그리고 제가 아들에게 묻듯 저희를 향해 묻고 싶으실 겁니다. 그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를 기억하느냐고.

하늘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이제야 눈물 흘리며 다시는 그 품을 떠나지 않겠다고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듭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장소가 아닌, 장차 돌아갈 하늘 내 고향을 일깨워주신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