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불변한 기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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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주부 김모 씨는 가족과 함께 장을 보러 나섰다. 기온이 섭씨 영하 2도라 겉옷을 챙겨 차에 올랐다. 내비게이션이 5㎞ 떨어진 대형마트까지 20분 정도 소요된다고 알린다.

먼저 남편의 구두를 사러 갔다. 남편은 275㎜와 280㎜ 구두를 신어본 뒤 넉넉한 사이즈를 택했다. 식품 코너에서는 저녁거리로 소고기 600g과 할인 중인 1L 우유 두 병, 5㎏짜리 사과 한 상자도 샀다.

기온부터 거리, 무게, 각종 치수….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이들을 규정하는 ‘단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문명의 척도, 단위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문명이 싹트면서 단위의 필요성이 커졌다. 농작지의 넓이를 재고, 수확한 농산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도량형(度量衡)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공정한 거래를 하려면 사물의 부피나 무게를 알아야 했고, 의복 등 제품을 만들고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자재의 치수를 정확히 해야 했다.

이에 가장 먼저 등장한 단위의 기준은 사람의 몸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발 길이를 ‘푸스’, 손가락 굵기를 ‘닥틸로스’라 하며 1푸스를 16닥틸로스로 정했다. 이처럼 사람의 신체나 능력에 기반한 단위를 일본에서는 ‘신체척(身體尺)’이라 부른다. 잘 알려진 신체척으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벌린 정도를 나타내는 ‘척(尺)’,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까지의 길이를 기준으로 한 이집트의 ‘큐빗(cubit)’이 있다. 상대적으로 작은 단위인 서양의 ‘디지트(digit)’는 손가락 하나의 너비였다.

하지만 신체척은 사람마다 몸이 달라 통일하기 어렵다. 이를 해결하고자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몸을 기준으로 한 ‘로열큐빗’을 정해 피라미드를 짓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구하기 쉽고 단단한 곡식도 단위를 정하는 데 이용됐다. 기원전 3세기, 중국 진나라는 피리 ‘황종적’의 길이를 단위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황종적은 기장 90톨을 늘어놓은 길이의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기장을 가지고 단위를 정한 셈이다. 그보다 작은 단위 ‘촌(寸)’은 기장 10톨을 줄 세운 길이였다.

무게 측정에 쓰였던 캐럽나무 씨앗(왼쪽)과 보리(오른쪽)

무게를 재는 데도 곡식이 주로 쓰였다. 로마는 캐럽나무 씨앗 1728개의 질량을 1로마파운드, 144개의 질량을 1로마온스로 정했다. 오늘날 다이아몬드의 무게를 재는 단위인 캐럿이 여기서 유래했다. 영국은 보리 7000알을 1파운드라고 했다. 그러나 곡식 역시 기후에 따라 무게와 길이가 달라지고, 알의 크기가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표준으로 삼기에는 부정확했다.

단위 통일을 위한 노력

1983년 7월 23일, 캐나다 에드먼턴으로 향하던 보잉 767 여객기에 연료 부족 경고음이 울렸다. 급기야 엔진이 꺼져 기장은 가까스로 비상 착륙에 성공했다. 이는 단순한 단위 착오에서 비롯된 사고였다. 기장이 킬로그램 단위로 표기한 연료량을 공항 직원이 그 값을 파운드로 계산해 급유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료를 필요한 양보다 절반 이상 적게 넣은 채 비행한 셈이었다1.

1. 1L는 0.8㎏, 1.77파운드.

1999년 9월에는 나사(NASA, 미국항공우주국)의 화성 기후 궤도선이 화성에 진입하다 추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또한 단위의 혼동 때문이었다. 나사는 미터(m), 킬로그램(㎏) 등 미터법 단위를 쓰는데, 탐사선을 제작한 기업의 한 팀에서 야드(yd), 갤런(gal) 등 야드파운드법 단위를 사용하고 있었다. 탐사선을 화성 궤도에 진입시킬 때도 이들은 여전히 다른 단위를 사용했고, 서로 엉뚱한 정보를 주고받다 사고를 부르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통일되지 못한 단위는 혼란을 일으킨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영주들이 제멋대로 도량형을 정해 사용하는 단위가 약 25만 개에 달했다. 의사소통과 거래에 문제가 생겼음은 물론 지역마다 영주 마음대로 세금을 걷을 수 있었다. 이런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발생했다. 본디 한 뼘을 기준으로 하는 ‘척’은 점점 길어져, 1875년 일본 메이지 정부가 채택한 척의 길이는 무려 30㎝였다. 이 또한 관리들이 세금을 더 걷으려고 단위를 점점 늘려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나 쉽게, 똑같이 잴 수 있는 과학적인 단위를 만드는 것은 과학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17세기 영국의 건축가이자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렌은 진자를 이용해 단위를 정하려고 했다. 막대에 달린 추가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초일 때, 그 막대의 길이를 표준으로 삼자는 주장이었다. 이밖에도 모세관현상2이나 빛의 파장 등 다양한 수단이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지구 둘레를 기준으로 하는 데 의견이 모였다.

2. 가는 관을 액체나 수은 속에 넣어 세웠을 때, 관 안의 액면(液面)이 관 밖의 액면보다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현상.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미터(meter)’를 기반으로 한 측량 단위다. ‘잰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메트론(metron)’에서 유래한 미터는 ‘적도에서 프랑스 파리를 거쳐 북극점까지 이르는 거리를 1천만 분의 1로 나눈 값’을 뜻했다. 프랑스 천문학자 들랑브르와 메생은 원정대를 꾸려 걸어서 그 거리를 측정했다.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1799년 12월 10일, 최초의 미터원기(原器)를 완성하고 미터법을 국가 표준으로 공포했다. 그리고 1미터짜리 자를 만들어 각 도시에 보급했다.

19세기 유럽 일대를 통일한 나폴레옹은 본격적으로 미터법을 전파했다. 1875년 5월 20일 프랑스에서 체결된 미터협약에 미국, 독일, 러시아, 브라질 등 17개국이 서명하면서 미터법은 보다 넓은 범위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단위를 수정하다

지구는 적도 부근이 불룩해 엄밀히 말하자면 완벽한 구 형태가 아니다. 따라서 측정하는 지역에 따라 그 둘레가 다르다. 이는 곧 지구 둘레를 기준으로 한 미터의 길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를 깨달은 과학계는 1889년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금속 중 화학적으로 가장 안정된 백금과 이리듐을 혼합해 만든 원기로 미터를 정의했다.

그러나 인공물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온도와 습도 등 주변 환경에 따라 팽창, 수축하거나 산화돼 미세하게 변한다. 미터원기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60년, 원자를 이용해 미터를 새롭게 정의했다3.

3. 크립톤 86 원자가 방출하는 오렌지색-적색 범위의 빛의 진공에서의 파장의 165만 763.73배.

학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83년, 어디서도 변하지 않는 빛의 성질을 바탕으로 한 정의를 새롭게 내렸다. 이제 1미터는 ‘요오드 안정화 헬륨·네온 레이저에서 나온 빛이 진공 상태에서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에 이동한 거리’가 됐다. 여기서 1초는 변하지 않는 세슘 133 원자의 진동주기를 기준 삼은 것이다4. 역설적인 것은 완벽한 진공 상태를 인공적으로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정의에 부합하는 1미터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계는 공기 중에서 헬륨ㆍ네온 레이저를 이용해 1미터를 측정하고 있다.

4. 1초는 세슘 133 원자의 진동주기의 91억 9263만 1770배.  

미터 외에도 질량의 단위 킬로그램과 시간의 단위 초(s), 전류의 단위 암페어(A), 열역학적 온도의 단위 켈빈(K), 물질량의 단위 몰(mol)과 광도의 단위 칸델라(Cd) 등이 현재 국제단위계(SI, System of international units)에 속한 기본단위다. 이 단위들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불변하는 기준이 되기 위해 그 정의가 끊임없이 수정, 변화됐다.

국제킬로그램원기

그중 킬로그램은 유일하게 실물 원기를 표준으로 삼으며 지금껏 정의가 바뀌지 않은 단위였다. 국제킬로그램원기는 백금 90%, 이리듐 10%의 합금으로 된 원통형의 추로, 높이와 지름이 각각 39㎜다. 파리 근교의 국제도량형국은 온도와 습도가 일정한 지하 금고의 삼중 유리관 속에 원기를 보관하며 매년 그 상태를 꼼꼼히 점검해 왔다.

그러나 국제킬로그램원기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했다. 23개국에 보관된 복사본과의 질량 차가 점점 커진 것이다. 2007년에 원기와 복사본의 질량을 측정했을 때 그 차이는 무려 100㎍5이었다.

5. 마이크로그램. g(그램)의 백만 분의 일.

이에 국제도량형총회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본 물리상수인 플랑크상수(h)6를 이용해 킬로그램을 재정의하기로 했다. 플랑크상수의 단위 J·s에서 에너지와 일의 단위인 J(줄)을 국제단위계에 따라 변환하면 kg·m2·s-1인 점에 착안해, 정확한 플랑크상수 값에서 역으로 킬로그램을 정의하는 것이다.

6. 빛 에너지와 파장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 상수.

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키블 저울(Kibble Balance)’을 동원한 몇 년간의 연구 끝에 플랑크상수의 고정값7이 도출됐다. 이를 통해 2018년 11월 16일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열린 제26차 총회에서 킬로그램을 새롭게 정의했다. 1889년 국제킬로그램원기 탄생 약 130년 만의 일이다. 새 정의는 2019년 5월 20일 세계 측정의 날을 기점으로 적용됐다.

7. 플랑크상수(h)=6.62607015×10-34J·s(㎏·㎡/s).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나아가 우주 어디서라도 변하지 않는 단위. 그 기준을 향한 인류의 열망은 다양한 시도와 연구로 이어져 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기준의 기초가 인공물에서 자연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표준의 표준’이라고 하는 시간부터가 빛을 기반으로 정의된다.

영원불변의 ‘기준’은 인간의 능으로는 쉽게 정할 수도, 만들 수도 없다. 오직 태초에 창조주께서 부여하신 만물의 법칙뿐이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욥 38장 4~5절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욥 11장 7~9절

참고
로버트 P. 크리스, 『측정의 역사』, 에이도스, 2012.
호시다 타다히코, 『별걸 다 재는 단위 이야기』, 어바웃어북, 2016.
김일선, 『단위로 읽는 세상』, 김영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