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파도가 뱃전을 두드리는 열흘간의 뱃길. 포구에 내려 80리 돌길을 걸어 겨우 당도한 제주 대정의 한 칸 초가. 뜻하지 않은 정쟁에 휘말려 유배 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가 기거할 거처였다.
조선 후기, 명문가의 후손이자 당대 최고의 학자·예술가로 칭송받으며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등의 중책을 역임하고, 외교사절단으로 간 중국에서 현지 학자·문인들과 왕성하게 교류했던 김정희의 유배 생활은 쓸쓸하고 황량했다. 거친 음식이나 질병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지인들의 야박한 인심이었다. 친한 벗과 사랑하는 아내의 연이은 부고는 깊은 슬픔과 낙심으로 이어졌다.
절해고도에 홀로 갇혀 뼈아픈 고독과 절망 속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김정희에게 한결같은 교분을 보여준 이가 있었다. 업무차 중국에 갈 때마다 스승 김정희가 좋아할 만한 책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상적1이다. 이상적은 집 한 채 값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황조경세문편》2 120권을 비롯해 다양한 신간 서적을 제주로 꾸준히 보냈다. 김정희는, 귀한 책을 세도가에게 바쳐 일신의 영달을 꾀하지 않고 권세 한 자락 없이 유폐된 자신을 예전과 똑같이 대하는 제자의 신의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1.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지중추부사, 온양군수 등을 지낸 문인이자 역관이다. 역관으로 열두 번이나 중국을 오가며 당대 저명한 중국 문인들과 교유했다. 시집 《은송당집》과 중국 문인에게 받은 편지글 모음집 《해린척소》가 전해진다.
2. 중국 청나라 때에 하장령과 위원이 편찬한 책. 청대의 경세논문(經世論文)을 모았다.
그의 우직한 정성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던 김정희는 붓을 들었다. 진한 먹물을 적신 붓을 옮길 때마다 초옥 한 채와 소나무, 잣나무가 간결하고 기개 있게 그려졌다. 완성된 그림 오른쪽 상단에 ‘우선시상(藕船是賞: 우선3 보게나)’이라는 글귀를 남겨 선물을 전할 대상을 분명히 밝힌 김정희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이라는 인장을 찍어 이상적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발문에는 봄여름에 푸르고 한겨울에도 여전한 상록수처럼 처지와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지 않는 절개를 간직한 이상적에 대한 찬사를 담았다. 이 그림이 대한민국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수묵화, ‘세한도(歲寒圖)’다. 두 사람의 웅숭깊은 정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걸작이다.
3. 이상적의 호
자신에게든 다른 누군가에게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한결같기란 쉽지 않다. 반대로 내 형편과 처지가 달라져도 상관없이 나를 똑같이 대해주는 이가 있다면 그보다 더한 홍복은 없다.
근심 없이 훨훨 날 것 같은 시절에는 형제의 관심이 가볍게 느껴지고, 큰 산을 한달음에 넘을 듯 힘이 넘칠 때는 자매의 응원이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시련의 터널을 지나거나 연단의 파도를 넘다 보면 알게 된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늘 내 곁을 지킨 이들의 소중함을. 하나님의 살과 피로 하나 된 시온의 형제자매가 우리에게는 복덩이들이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응원인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처럼 사시사철 청청한 모습으로 의의 열매를 맺자. 하나님의 걸작, 영원한 사랑의 나라가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