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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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면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은혜로운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 십자가에 못박히시며 죽기까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사랑을 사도들이 깨달았을 때 전도의 부흥이 일어났고 복음이 전 세계에 급속도로 퍼져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 마지막 시대에도 우리가 하늘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고 하늘 아버지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에 잃어버린 하늘 가족들을 신속하게 시온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

옛날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어머니의 어린 아들은 몹쓸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며칠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며 오직 아들을 살리는 데만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들어와 물 한 모금을 청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나그네를 위해 물과 약간의 음식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준비를 마치고 나와 보니 나그네는 간데없고 어머니의 소중한 아들까지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아들을 찾아 사방을 헤맸습니다. 어느새 밤은 깊었고 어머니의 마음은 안타까움만 더해 가는 가운데 아들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찾아 헤매다 그만 발을 헛디뎌 큰 호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호수의 신이 나타나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호수를 건너게 해 줄 테니 당신의 아름답고 보석처럼 영롱한 두 눈을 내게 주시오.”

어머니는 아들을 찾겠다는 간절한 마음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호수의 신에게 두 눈을 빼어 주고 호수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두 눈을 잃어버려 지척을 분간할 수조차 없는 장님의 몸으로 그저 아들의 이름만 부르며 발길이 닿는 대로 헤매던 어머니는 낭떠러지에 발을 내디뎌 깊은 계곡으로 떨어졌습니다. 계곡에는 가시덤불이 무성했습니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어머니의 몸은 가시덤불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때 가시나무의 신이 나타났습니다.

“추운 겨울이기에 내 몸은 이렇게 꽁꽁 얼어붙었소. 어머니의 가슴은 뜨겁다고 하던데, 당신의 뜨거운 가슴으로 나를 안아 얼어붙은 내 몸을 녹여 주면 당신을 가시덤불 속에서 빠져나가게 해 주겠소.”

어떻게 하든지 이곳을 빠져나가서 아들을 꼭 찾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가시나무 신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북풍 한설이 몰아치는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가시나무를 부둥켜안았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사정없이 찔러 들어와 온몸에 선혈이 낭자했지만 가시나무를 녹여야만 아들을 찾으러 갈 수 있기에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해 오랫동안 꼭 부둥켜안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얼어붙어 있던 가시나무는 서서히 녹기 시작하더니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싹을 틔웠습니다. 그러자 가시덤불은 저절로 물러나 어머니에게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온몸이 찢겨진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시덤불을 겨우 빠져 나온 어머니는 다시금 아들을 찾는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자신의 두 눈이 어찌 되었든, 자신의 몸이 어떻게 찢기었든 개의치 않고 오직 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습니다.

얼마를 가다 보니 무덤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곳에서는 무덤의 신이 어머니를 불러 세웠습니다. 무덤의 신은 사람들이 보기에 혐오감을 느낄 만큼 늙고 추한 노파였습니다.

“내 허락 없이는 더 이상 갈 수 없소. 당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나에게 준다면 보내주리다.”

어머니는 자식이 없는데 젊음과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무덤의 신의 요구대로 자신의 젊음을 주어버리고 자신은 무덤의 신이 가지고 있던 늙고 흉측한 모습을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다리에는 힘이 없고 온 몸은 쭈그러들어 늙고 추한 모습이 된 어머니는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희생한 다음에야 그렇게 애타게 찾던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가없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그린 옛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이처럼 지고지순한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온 인류 인생들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에 깃든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라는 단어를 부르기만 해도 코끝이 찡해 오고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이유가 어머니의 이러한 희생적인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어머니라는 존재를 좋아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 사랑을 배웠고 사랑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영의 아버지, 어머니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우리들에게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시는데 우리가 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거나 그 희생의 길을 끝까지 따라 걸을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의 도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무조건적인 희생과 크신 사랑을 값없이, 공로 없이 거저 주고 계시는 하늘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새 언약의 도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인 자녀를 위하는 육신적인 어버이의 사랑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희미하게라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롬 1장 18∼20절

“…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장 10∼11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천지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는 사랑이 많으며, 왜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일에 희생적이겠습니까? 이는 무엇을 알려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잃어버린 자녀를 찾을 수만 있다면 두 눈이라도 빼어내시고, 온몸을 희생하시며 젊음이라도 다 내어놓을 수 있는 분이 바로 어머니이십니다. 우리 자녀들에 대한 지극하신 사랑 때문에 죄악의 땅, 이 흑암 세상에까지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머니라는 존재의 이미지 속에 하나님께서 깊이 각인시켜 놓으신 그 희생적인 사랑만 보더라도 우리 영의 어머니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쉽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누군가가 “어머니를 위하여 네 젊음을 늙음과 바꿀 수 있는가?” 혹은 “두 눈을 빼어서라도 어머니에 대하여 효의 도리를 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선뜻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대답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을 실행으로 옮겨야 되는 실제 상황이 된다면 과연 어느 누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와 제자들이 어떠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했던 그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는 모두가 부인하며 떠나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장 27∼50절

자식은 아무리 부모를 위한다고 해도 그 정도밖에 할 수 없나 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아낌없이 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된 보좌라도 기꺼이 버리시고 죄인들의 옷인 육체를 입고서라도 오실 수 있는 하늘 어머니의 사랑을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시기와 질투, 분쟁과 같은 일들이 발생하지만 비록 작은 것에서라도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고 느낀다면 최고의 믿음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랄 수 있으며, 그 사랑 속에서 아무런 위험이나 사고가 없도록 막아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오늘을 무사히 지낼 수 있다는 깨달음과 감사를 잊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허무한 삶을 살아가던 자녀들을 구원하러 오신 어머니

며칠 전에 저는 한 사람의 죽음을 보게 되었고 그 죽음의 끝을 마무리하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고인은 말기의 암환자로 사십 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해서 화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켜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화장터에서 나온 것은 결국 한 줌의 재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한 줌의 재를 남기기 위해서 사십 년간을 먹고, 입고, 경쟁하며 부와 명예를 위해 애쓰고 수고했을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없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육신의 것이 정말로 헛되고 헛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육칠십 년을 살아도, 이삼십 년을 살아도 결국은 한 줌의 재로 변할 인생인데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썩어 없어질 육신의 것을 위하여 그토록 애쓰고 수고하는가 하는 생각에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들은 한 줌의 재를 남기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다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러한 어리석은 길을 자녀들이 따르고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깨우치기 위해 성경을 통해 수없이 세상 만사가 헛되고 헛되다는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전 1장 1~10절). 하나님의 귀한 가르침을 받은 우리가 한 줌의 재로 남을 육신을 위해 삶의 전부를 바쳐서야 되겠습니까?

이사야서 53장을 보면서 인생의 모습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자녀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 어머니의 지고지순하신 사랑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느껴 봅시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 그는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장 1∼9절

이 땅에 오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흠모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청춘과 젊음을 다 바치고 아름다움도 다 바쳐야만 그 마지막 순간에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희생과 아픔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인데도 우리는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의 그 과정을 생각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누구의 희생과 사랑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까?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릴 소망 없는 삶을 살아가지 않고 진정한 희망과 귀한 소망 가운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지고하신 희생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암송아지의 희생으로 정결함을 입는 규례의 의미

아무리 시대가 달라지고 도덕과 윤리가 다 깨어지는 시대가 되어도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지극한 마음은 그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없앨 수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 만물의 이치를 통해서라도 우리 영의 어머니께서 자녀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그 이치를 터득하시고 배워가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아는 것도 귀하고 소중하겠으나 그 계명 가운데 들어 있는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깨닫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의 계명을 안다면 그것은 소리 나는 구리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고전 13장 1~13절). 물론 하나님의 계명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지만 그러한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성경의 가장 근본된 뜻입니다.

구약의 제도 가운데 예표로 나타난 모든 희생 제물의 모습이, 2천 년 전 희생의 제물과 속건제 제물로 희생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자녀들을 찾아 구원하시려 모든 것을 불태우시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에게 제삼일과 제칠일 예배를 주시고, 그 규례를 통하여 자녀들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며 자녀들이 하나님의 총회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당신을 불사르고 희생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구약의 제도 속에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깨달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 이에 정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드는 데 쓸 것이니 곧 속죄제니라 …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삼일과 제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삼일과 제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이는 그들의 영영한 율례니라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린 자는 그 옷을 빨 것이며 …”민 19장 1∼21절

구약에 나오는 모든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 등의 제물로 사용되었던 짐승은 특별히 암컷과 수컷을 가려 구분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양으로 수컷을 사용하라고 하셨기에 그 예언을 성취하실 예수님께서 남성으로 이 땅에 임하셔서 희생되셨습니다.

민수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있다면 암소에 대한 내용입니다. 암송아지를 불사르되 모든 것을 다 불태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정함을 씻어주는 잿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 암소는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며 어떤 하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제삼일과 제칠일 예배에서 정결함을 얻고 있습니까?

이는 바로 성령의 신부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어머니를 표상하고 있는 희생의 제물입니다. 제삼일과 제칠일에 암송아지의 희생으로 정결함을 입는 규례는 부정한 자녀들을 깨끗게 하는 희생 제물로서 당신의 몸을 불태워 온전히 사르시는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삼일과 제칠일 안식일 예배를 통해 암송아지로 표상된 우리 어머니께서 모든 것을 살라 희생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더럽고 추한 허물과 죄악이 사해져 정결함을 입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의 그 아픔과 고통, 희생과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녀가 되자

온 우주 영물들에게까지 영광과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영광의 자리를 뒤로 하시고 오히려 육체를 덧입어 가시면서까지 자녀들 찾기만을 원하고 계시니 우리들이 그 희생과 사랑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아직도 우리 자녀들은 아픔을 드리는 입장이고 어머니께서는 그 아픔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바라볼 줄 아는 영안을 열어야 될 때입니다. 우리들의 죄가 얼마나 많았기에 삼일과 안식일을 통해서 어머니의 희생을 끊임없이 요구해야 되는지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죄 사함을 받았다고 간단히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축복 가운데는 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을 때 하나님은 찔림을 받으셨고, 우리가 평화를 누릴 때 하나님은 오히려 채찍을 맞고 계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희생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죄 사함입니다. 그러니 삼일 예배와 안식일 예배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며 감사치 못하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사랑을 덧입지 않고는 우리가 결코 천국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들의 힘과 능력으로는 절대로 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으로 우리는 정결함을 입을 수 있고, 어머니께서 우리의 허물을 인해 찔리고 상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어 평화를 누릴 수 있으니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랑을 절대로 잊어버리거나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육의 심비에 새기고 늘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과 22장의 말씀을 보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무리들이 복이 있으니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거룩한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만들어진 잿물에 우리의 부정과 허물을 씻어버리고 정결함을 덧입어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거룩한 무리로 거듭나고 있으니 참으로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무엇인들 감사치 않을 것이 있겠으며 우리 형제자매를 위하여 무엇인들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며, 삼일 예배와 안식일 예배를 거룩하게 여겨야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무조건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어머니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늘 불만족스러워하며 불평을 드리겠습니까? 늘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조르기만 할 것입니까?

우리는 지각을 사용하여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믿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히 5장 14절). 이제는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무엇을 바라실지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이해할 줄 아는 자녀들이 되고, 어머니께서 친히 본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직 잃어버린 우리 하늘 형제자매를 다 찾아 영원하고 영원한 천국을 회복하고, 우리 하늘 어머니를 영광의 보좌에 좌정하시도록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최대의 효도입니다.

십사만 사천 막내둥이를 어머니의 품에 안겨드리는 날이 우리들을 위해서 희생하신 어머니의 사랑에 온전히 보답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고 항상 감사하는 우리 자녀들이 되어서 세상 땅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