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설핏 넘어가는 늦은 오후, 커다란 가마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마른 짚에 쌀겨, 콩깍지, 깻묵 등을 함께 넣어 푹 끓이다가 솥뚜껑을 덮고 한참 뜸을 들인다. 솔솔 나는 쇠죽 냄새에 배고픔 담긴 소의 ‘음매’ 소리가 들린다. 한 바가지 퍼다가 구유에 부어주면 커다란 눈을 끔벅이던 소는 긴 혀를 날름거리며 여물을 맛나게 먹는다. 느리지만 우직하게 밭을 갈던 소는 허기진 배를 허겁지겁 채우고는 외양간에 드러누워 두 눈을 감고 느긋하게 되새김질한다.
위가 4개의 방으로 나뉜 반추동물

지금은 보기 어려워진 시골 풍경이지만 과거 농촌에서는 ‘사람 끼니는 굶겨도 소는 안 굶긴다’는 말이 있을 만큼 소를 귀히 여겼다. 장정 대여섯 명 이상의 일을 해내는 생산력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살아온 여러 가축 가운데 왜 하필 소가 농사일을 돕게 된 것일까?
과거 서양에서는 말을 농사에 이용하기도 했으나 소에 비해 지구력이 부족해 크게 활용되지는 않았다. 특히 논농사가 중심을 이룬 동양에서는 무른 진흙밭에서 말을 부리기가 쉽지 않았고 골격이 가늘어 다칠 위험도 컸기 때문에 소가 더욱 각광받았다. 게다가 말은 더 긴 시간, 더 많은 양을 먹으면서도 소와 같은 반추동물이 아니라 에너지 흡수율이 낮았다.
‘반추(反芻)’란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내 씹는 것으로, 소화가 힘든 섬유소가 많이 들어간 식물을 먹이로 삼는 일련의 포유류가 하는 행위다. 소를 비롯해 낙타, 사슴, 양, 기린 등이 반추동물에 속한다. 되새김질하는 특수한 위 구조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반추동물의 대표격인 소를 떠올려보자. 소는 1개의 위를 가진 사람과 달리 4개의 위를 가지고 있다. 소가 질긴 풀을 우걱우걱 대충 씹어 삼키면 제일 먼저 불룩 튀어나온 제1위인 혹위로 들어간다. 150리터에 달하는 거대한 혹위는 먹이와 미생물, 침을 뒤섞어 벌집위로 불리는 제2위로 보낸다. 벌집 모양의 거친 점막으로 이뤄진 벌집위는 꿀렁거리며 죽처럼 부드러워진 먹이를 둥그스름한 덩어리로 뭉친다. 소는 이것을 ‘끄윽’ 하고 트림하듯 게워내 다시 질겅질겅 씹는다. 바로 되새김질이다.
소는 위에서 꺼낸 덩어리에서 수분을 분리해 다시 삼키고 입에 남겨진 건더기를 침과 잘 섞어 50번 이상 씹어 넘긴다. 13~20번에 나눠 하루 6~9시간 정도 되새김질에 몰두한다. 낮보다는 밤에, 특히 일몰 직후에 가장 열심이다. 저작 횟수, 즉 씹는 횟수만 해도 하루 3만 번에 달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겹주름위 또는 천엽이라고 불리는 제3위에 도착한 내용물은 잘게 부서지고 제4위인 주름위를 거치면서 완전히 소화된다.
너른 초장에서 풀을 뜯는 반추동물은 먹이를 먹을 때 포식자의 공격을 받기 가장 쉽다. 그래서 먹이가 있는 자리에서 소화하는 데 시간을 쓰는 대신 최대한 빨리 많은 먹이를 집어삼키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다. 위험 요소가 없음을 확인한 뒤 위에 가득 넣어둔 음식물을 되새김질함으로써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풀만 먹고도 살찐다
체중감량을 위한 식단에는 채소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람은 식물의 주요 구성성분인 섬유소(cellulose)를 소화할 수 없어 영양분을 거의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물만 먹고 사는 초식동물조차도 섬유소를 분해하거나 흡수하지 못한다. 대신 섬유소를 분해하는 효소를 가진 미생물들을 소화기관에 입주시켜 도움을 받는다.

소의 위에는 박테리아, 원생동물, 혐기성 곰팡이 등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다. 미생물의 절반가량이 박테리아며 밝혀진 것만도 200종이 넘는다. 대부분 혹위에 거주하고 있어서 풀이 도착하자마자 섬유소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풀과 섞인 미생물들은 되새김 과정을 함께하며 섬유소에서 나온 포도당을 다시 발효시켜 지방산뿐만 아니라 아미노산과 비타민까지 합성한다. 소는 이것들을 흡수하므로 풀만 먹고도 다양한 영양소를 얻을 수 있다.
제3위는 되새김질을 거친 내용물에서 수분을 흡수한다. 제4위는 사람의 위처럼 산성 환경으로, 강한 소화액을 내뿜는다. 남아 있는 음식물은 물론, 반추위에서 생성된 미생물까지 몽땅 소화한다. 소나 양 같은 반추동물이 풀만 먹고도 커다란 덩치로 자라는 비결이다.
토끼도 되새김질한다
성경은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는 유대인의 식습관을 설명하며 토끼를 새김질하는 동물로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토끼는 되새김질이라도 하듯 종일 입을 오물거린다. 그러나 반추동물과는 다르게 위를 하나밖에 갖고 있지 않아 토끼의 되새김질은 오랜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토끼의 비밀은 꺼림직하게도 배설물을 먹어 되새김질하는 것이었다. ‘자기분식(自己糞食, Caecotrophy)’이라는 이 행동은 토끼뿐만 아니라 비버, 기니피그, 포섬 등에서도 발견된다. 토끼처럼 작은 초식동물은 여러 개의 위를 가질 만큼 몸집이 크지도 않은 데다 신진대사가 빨라 음식물로부터 최대한 빨리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래서 소화 가능한 영양분을 일단 섭취해 1차로 배설한 뒤, 다시 이를 소화하는 전략을 쓰는 것이다. 토끼의 자기분식 행동은 반추동물의 되새김질과 방식은 다르지만 영양분을 효율적으로 섭취하기 위해 음식물이 소화기관을 두 번 지난다는 점에서 원리는 동일하다.
토끼가 되새김질을 위해 먹는 배설물은 좀 특별하다. 토끼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그랗고 딱딱한 배설물 외에도 ‘식변(Cecotrope)’이라는 부드러운 대변을 눈다. 작은 알갱이가 포도송이처럼 뭉쳐있으며 점액에 싸여 반짝인다. 토끼는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이를 누가 볼세라 얼른 먹어 치운다. 대개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라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식변은 56퍼센트가 미생물이고 24퍼센트가 단백질로 이뤄져 있으며 영양소가 풍부해 토끼에게는 아주 귀중한 양식이다. 전체 소화기관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긴 토끼의 맹장에서 미생물에 의해 발효된 것으로, 맹장에는 반추동물의 위처럼 수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다. 토끼도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섬유소를 분해하고 비타민과 무기염류 등을 얻는다. 식변에 포함된 미생물은 위산에 녹지 않도록 점액에 둘러싸여 보호받는다.
식변을 오해해 먹지 못하도록 사람이 치워버리면 토끼는 영양부족과 소화불량에 시달리게 된다. 단백질 섭취량은 약 20퍼센트 줄어들고 비타민 B2는 전혀 섭취할 수 없다. 게다가 장내 미생물의 양과 질이 모두 나빠져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다양한 생리적 부작용을 겪게 된다. 제대로 성장할 수도 없을뿐더러 생명조차 위태로워지는 것이다.
온순하고 연약한 초식동물은 천천히 되풀이하는 새김질로 거칠고 억센 풀로부터 최대한의 영양분을 거둔다. 조금 느릴지라도 쉬지 않고 되새김질함으로써 식물에 없는 귀한 영양분까지 얻는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소에게서 되새김질을 배우라고 했다. 끊임없는 되새김질을 통한 자기 성찰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우리 삶에서 꼭 갖춰야 할 덕목이기 때문이다.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하나의 교훈과 지혜라도 꼼꼼히 곱씹고 마음에 새겨보자. 온전히 내 것이 되고 그 안에 담긴 깊은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