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타임캡슐,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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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담긴 물건들과 추억까지 함께 넣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개봉하는 타임캡슐. 최초의 타임캡슐은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 때 묻힌 것으로 5,000년 뒤인 6939년에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만물 속에도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생명을 싹 틔우는 타임캡슐이 있다. 바로 씨앗이다. 가장 오래된 타임캡슐이 100년이 채 되지 않은 데 반해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어느 종려나무 씨앗은 2,0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싹을 틔웠다. 이 견고한 식물의 씨앗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식물의 가장 많은 종을 차지하는 속씨식물은 꽃가루와 밑씨가 만나 씨앗을 만든다. 동물과 달리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성숙한 꽃가루를 다른 꽃의 암술머리에 옮기기 위해 물, 바람, 곤충, 새 등의 도움을 받는다.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안착했지만 밑씨와의 거리는 아직도 멀다. 그래서 꽃가루는 꽃가루관이라는 긴 관을 만든다. 꽃가루관이 밑씨에 도착하면 꽃가루에 있는 핵이 관을 타고 내려가 밑씨와 결합하여 수정된다. 그러면 꽃은 금방 시들어버리고 식물은 씨앗을 내보낼 준비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씨앗 중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은 ‘코코드메르Coco de mer’다. ‘바다 야자’라는 뜻의 코코드메르는 열매가 바다를 둥둥 떠다니다 해변으로 떠밀려 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세이셸 야자라고도 불리는 코코드메르의 씨앗은 크기가 농구공만 하다. 그 무게만도 무려 20킬로그램에 달한다. 반면, 가장 작은 난초과의 씨앗은 10만 분의 1그램으로 먼지만큼 작고 가볍다.

종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씨앗은 식물체가 될 배아와, 발아 중에 필요한 영양분을 간직하고 있는 배젖, 씨앗을 보호하고 있는 껍질로 이루어져 있다. 씨앗은 마치 젖병을 물고 요람 속에서 잠든 아기처럼 보인다. 오랜 시간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과 달리, 일찍이 모체에서 분리되어야 하는 식물들은 엄마의 사랑을 한 번에 받아 세상에 나온다.

모체에서 떨어진 대부분의 씨앗들은 일정 기간 싹을 틔우지 않고 잠을 잔다. 이것이 씨앗의 휴면이다. 가을에 씨앗이 떨어져 바로 싹이 나면 곧 닥칠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버리기 때문에 적당한 환경이 갖춰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씨앗은 계절과 기온 그리고 토양의 습도가 적절할 때 깨어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 조건이 맞으면 싹을 틔운다. 휴면 상태의 씨앗들은 온도 변화와 같은 생리적 후숙을 거쳐야 하는 것도 있고 여러 종류의 발아억제물질을 가지는 것, 껍질이 단단하여 물을 흡수할 수 없는 것 등이 있다.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에게는 씨앗이 빠르고 고르게 싹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농부는 환경의 변화를 주어 잠자는 씨앗을 흔들어 깨운다. 씨앗에게 싹을 틔울 때가 됐음을 인위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씨앗을 젖은 모래와 섞어 땅속에 묻어주거나 냉장고나 냉동실에 일정 기간 보관하여 온도 차를 느끼게 하는 방법이 있다. 씨앗의 껍질이 너무 단단한 경우에는―씨앗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일지 모르지만―모래와 혼합하여 절구에 넣고 찧어 껍질에 상처를 내거나 진한 황산과 같은 약품으로 겉껍질을 녹이기도 한다. 또 액체공기를 이용하여 영하 190도의 저온처리를 하거나 영상 100도 이상의 고온에 잠시 보관하여 발아억제물질을 불활성화시키기도 한다.

발아 전의 씨앗은 수분이 채 5퍼센트가 안 될 만큼 대사 반응이 매우 느린 상태다. 건조한 씨앗은 어떠한 생명의 징후도 보이지 않아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씨앗이 물을 흡수하면 부풀어 올라 껍질이 파열되고 싹을 낼 준비를 한다. 물은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씨앗은 종에 따라 일정한 온도에서 싹을 틔운다. 발아 중인 종자는 아직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동물처럼 호흡만 하기 때문에 산소 공급은 꼭 필요하다. 상추, 무화과나무 같은 특별한 씨앗은 빛을 받아야만 발아한다. 반대로 오이, 토마토처럼 빛이 없어야 싹을 틔우는 씨앗도 있다. 그렇게 물, 온도, 산소, 빛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씨앗은 싹을 틔운다.

이러한 씨앗의 특성을 이용하여 UN 산하의 식량농업기구(FAO)는 북극권에 있는 스발바르Svalbard제도의 한 섬 지하에 국제 종자 저장고를 건설해 운영하고 있다. 향후 기후변화 등 전 지구적인 재앙이 닥칠 때를 대비하기 위해 세워진 이곳은 ‘최후의 날 저장고’ 또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도 일컬어진다. 지금 세계 각국에는 1,400여 곳의 장단기 보관용 종자보관소가 있다.

작은 씨앗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작고 나약해 보인다. 그러나 춥고 혹독한 겨울을 잘 버텨내고 발아하면 작은 씨앗 속에 숨겨졌던 강한 힘이 드러난다. 실려 있던 벼가 싹 트는 바람에 나무배가 두 동강 났다거나 저장해뒀던 곡물이 싹을 틔워 저장소를 부쉈다는 이야기처럼 움트기 시작한 씨앗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강력하다.

발아가 시작되면 배아는 배젖을 양분으로 삼아 자란다. 광합성을 하는 잎이 없기 때문에 배아는 호흡만 할 뿐 스스로 영양분을 생산할 수 없다. 배아가 자라면서 씨앗 속의 양분은 점점 감소한다. 하지만 샛노란 떡잎이 자라 초록의 엽록소가 생성되면 점차 광합성을 하고 뿌리도 힘을 얻어 영양분을 직접 흡수할 수 있게 된다. 보잘것없던 작은 씨앗이 조금씩 모체 식물을 닮은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커다란 생명체가 살고 있다. 바로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무, 자이언트 세쿼이아다. 남북전쟁 때의 장군 이름을 딴 이 나무는 높이가 무려 약 83미터에 달하며, 밑동의 둘레만도 약 31미터에 이른다. 제트기 여섯 대를 합친 것보다 큰 제너럴 셔먼도 2,000년 전에는 6,000분의 1그램에 불과한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책도, 걸터앉는 나무 의자도 모두 아주 작은 씨앗에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씨앗이 인고의 잠에서 깨어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거대한 나무가 된다는 것은 경이롭고 신기한 일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 옛날의 물건들을 간직하는 타임캡슐처럼, 씨앗 속에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꺼지지 않는 생명력의 불씨가 담겨 있다. 작은 씨앗 속에 담긴 생명의 신비가 참으로 오묘하다.

참고
『식물생리학』 (윌리엄 홉킨스 著)
『씨앗의 자연사』 (조나단 실버타운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