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가정 형편이 몹시 어려웠습니다. 엄마는 칠 남매를 먹여 살리려고 벽이나 바닥, 변기를 수리하는 고된 일을 하셨습니다. 인부를 고용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엄마 혼자서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막일을 하는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막내딸이었습니다.
엄마는 식료품을 사려고 밤새 가방을 수선해 공장에 납품하는 일도 했는데, 저는 오래된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습니다. 밥 한 끼 해결하기가 빠듯한 상황인데도 철없는 저는 생일마다 “한 번도 생일 케이크를 받은 적이 없다”고 불평하며 토라지기 일쑤였습니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의 생일에 작은 파티를 열어 엄마를 초대했습니다. 엄마는 매우 기뻐하면서 제가 직접 만든 생일 케이크가 훌륭하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자식까지 낳아도 철이 없는 건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엄마의 칭찬에 우쭐해진 저는 평생 후회할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엄마, 나는 내 아이가 나처럼 슬퍼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케이크 만드는 기술을 배웠어. 엄마는 내 생일에 단 한 번도 케이크를 선물해준 적이 없었지.”
엄마는 몹시 슬픈 기색이었지만 죄인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고된 일을 계속하던 엄마는 결국 건강이 악화돼 시력마저 잃었습니다. 다행히 정부에서 연금을 지급해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문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크고 예쁜 케이크를 품에 안은 엄마가 와 계셨습니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놀랐지만, 시력을 잃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집 안에 들어온 엄마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첫 연금이 나왔단다. 딸아, 돈이 없어서 여태까지 네 생일에 케이크를 못 해줬는데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이 많이 아팠단다. 오늘은 연금이 나와서 너를 위해 케이크를 살 수 있었어. 생일 축하한다. 소중한 내 딸!”
엄마의 발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습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집을 찾아왔는지 물었더니, 시력을 잃기 전 예전의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직접 걸어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엄마가 케이크를 산 빵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1.5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시력이 멀쩡한 사람이 걷기에도 부담스러운 거리지요. 저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낳아주고 길러준 데 대한 감사는커녕 불만을 쏟아내며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제가 얼마나 나쁜 딸이었는지….
엄마는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딸에게 케이크를 전해주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습니다. 무거운 케이크를 들고 오느라 엄마의 팔은 퉁퉁 부어 있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엄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고된 일을 하며 자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준 엄마에게 어린아이처럼 투정만 부렸습니다. 그런 저인데도 엄마는 밉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베풀어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케이크를 안은 채 환하게 웃는 엄마의 모습에 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지금 엄마는 제 곁에 없습니다. 하지만 엄마의 한없는 사랑과 희생은 제 마음속에 가득 남아 있습니다. 케이크를 볼 때면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엄마가 보고 싶어 하염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엄마가 제게 베풀었던 사랑을 떠올리면 하늘 어머니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늘 어머니께서도 자녀들을 살리시기 위해 모진 고생을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자녀들은 늘 부족하다고 힘들다고 불평불만하지만, 그런 자녀조차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시면서 천국에 꼭 같이 가자 토닥이며 위로해주십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먼 길 걸어 딸을 찾아온 엄마처럼, 하늘 어머니께서도 사선을 넘어 자녀들을 찾아 친히 육체의 옷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철없는 자녀들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위해 쉼 없이 기도해주십니다.
하늘 어머니께 진심을 담아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희생을 늘 기억하며 잃어버린 형제자매를 찾는 데 힘쓰는 자녀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