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기 어려운 일을 해결해야 할 때, 소소한 바람이나 욕구를 채우고 싶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크고 작은 부탁을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작은 부탁이라면 쉽게 들어줄 거라는 기대에서, 어려운 부탁이라면 힘들게 입을 떼는 만큼, 부탁하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답은 단연 “Yes”다.
이때 상대가 부탁을 흔쾌히 수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탁한 사람은 원하는 바를 이뤄 만족하고, 부탁을 들어준 사람은 뿌듯함을 느껴 둘 사이가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상대의 부탁을 들어줄 상황이 못 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혹은 안 들어주는 편이 상대에게 더 낫다고 생각돼 거절하는 경우 문제가 생긴다. 거절은 상대방의 기대에 반하는 의사 표현이므로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썩 유쾌하지 않고, 자칫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길에서 카드 신규 발급을 권하는 영업 사원, 가게 앞에서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 등 나와 관계없는 상대라면 부탁을 단호히 물리치기 쉽다. 그러나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 사람은 다르다. 그렇다고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며 살 수도 없는 법. 과연 ‘거절’이라는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못해도 문제, 단칼에 해도 문제
한 포털사이트에서 성인 465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거절하기 가장 힘든 상황은?’이라는 물음에 ‘친구 또는 가족이 부탁할 때’라고 답한 사람이 32.2퍼센트로 가장 많았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게 바라는 바가 크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거절이 쉽지 않다. 거절했을 때 상대방이 느낄 섭섭함으로 인한 죄책감도 크다.

특히 부탁하는 사람이 손윗사람이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자녀일 때 거절은 더욱 어렵다. 오죽하면 ‘착한 아이 증후군’, ‘좋은 부모 콤플렉스’라는 말도 있을까. 그러나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느라 싫어도 싫은 내색 하지 않는 아이,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느라 지친 부모가 행복할 리 없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뭐든지 들어주는 것은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된다. 아이에게 독립심을 키워주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 자르듯 단칼에 거절하라는 뜻이 아니다. 가족 간에는 워낙 허물없이 지내는 통에 때로는 “안 돼”, “싫어” 하고 단답형으로 성의 없이 거절 의사를 표하기도 한다. 특히 부탁한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여길 때 아무런 고민 없이 상대의 부탁을 단호히 물리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단번에 거절당하면 부탁한 사람은 섭섭할 뿐만 아니라 무시당하는 기분, 낙담, 수치심, 심지어 분노까지 느낀다. 그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생채기는 이후에 상대가 부탁을 들어주더라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거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유가 어떻든 상대의 청을 들어줄지 말지 선택은 부탁받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니 말이다. 문제는 대부분 거절하는 태도에서 불거진다. 거절 의사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둘 사이의 기류가 차가워지기도, 따뜻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불가피하게 거절하게 되더라도 갈등과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관계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거절하기
거절의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그것을 부탁하거나 제안한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거절도 일종의 의견인데, 감정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싫어하거나 무시해서 거절한다고 상대방이 느끼지 않도록, 그 인격을 존중하면서 배려하는 마음을 담아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경청’과 그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공감’이 필요하다. 상대방이 어떤 부탁을 할지 짐작되더라도 ‘어차피 거절할 일, 굳이 다 들을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을 자르기보다는, 그 사람의 처지와 어려움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헤아려주면 거절로 인해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또,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도록 이유를 설명해 주어야 서운함을 덜 느낀다. “피곤하게 일일이 다 말해야 해?”라며 내 입장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까닭에 도와주기 어렵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귀찮은 상황을 모면하려 핑계를 대는 행위는 피해야 한다. 이는 ‘당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거절 의사를 표현할 때는 “아니”, “안 돼”, “싫어” 이런 식의 단정적인 표현을 삼가고, 부정적인 느낌이 덜 하도록 친절한 말씨를 사용해야 한다. ‘안 된다’ 보다는 ‘어렵다’, ‘힘들다’와 같은 완곡한 표현을 쓰는 것이 좋고, “죄송하지만⋯”, “모처럼의 부탁인데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와 같은 완충 작용을 하는 말을 덧붙이면 훨씬 부드럽게 전달된다.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유머러스한 말로 거절하는 것도 듣는 사람을 무안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상대의 부탁을 온전히 들어주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것이나마 도와준다거나,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정보를 알려준다거나, 대안을 같이 고민하는 등 상대의 마음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호의를 베푼다면 거절에 대한 부담도 덜고 상대가 느낄 실망감도 줄일 수 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요청이나 부탁을 받더라도 비난과 무시는 금물이다. 거절로 인해 관계가 깨어지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면 온화한 태도와 예의를 지키자.
상황별 배려를 담아 거절하는 방법
“재활용 쓰레기 좀 버려줄래요?”
- “싫어, 나중에 할게.” (X)
- “지금은 다른 일 때문에 어려울 것 같아. 삼십 분 뒤에 할게.” (O)
“엄마, 안아줘. 나 혼자 놀기 심심하단 말이야.”
- “얘가 자꾸 왜 이래? 엄마 밥하는 거 안 보여? 저리 좀 가 있어!” (X)
- “엄마한테 안기고 싶구나. 엄마도 너 안아주고 싶은데, 아빠 오시기 전에 식사 준비해야 돼. 그동안 거실에서 책 보고 있을래, 아니면 엄마 요리하는 거 구경할래?” (O)
“추운데 창문 좀 닫아줄래요?”
- “뭐가 춥다고 그래?” (X)
- “많이 추운가 봐요. 갑갑해서 그러는데 그럼 살짝만 열어놓아도 될까요?” (O)
“식료품을 사야 하는데, 오늘 저녁에 같이 가줄 수 있어요?”
- “바빠서 안 돼!” (X)
- “내일이 마감이어서 오늘까지는 일을 끝내야 해. 미안해. 모레쯤은 가능할 것 같아.” (O)
“이번 주말에 같이 등산 가자.”
- “안 돼! 약속 있어.” (X)
- “나도 당신과 등산 가고 싶은데 이번 주는 이미 약속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다음 주는 괜찮은데, 어때요?” (O)
(나이 든 부모님이 노파심에서)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아침은 거르면 안 된다.”
- “제 나이가 몇인데 그러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간섭하지 마세요.” (X)
- “늘 염려해주셔서 감사해요. 걱정 끼치지 않도록 건강 유의할게요.” (O)

어떤 사람이 명문대에 입학하려고 지원했으나 탈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그 학교에 대한 원망 대신 애정이 더 커졌다고 했다. 그가 받은 따뜻하고 정중한 불합격 통보 때문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당신의 앞날에 행운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라는 말로 끝맺은 장문의 통보서는, 불합격으로 인한 실망감보다 더 큰 감동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배려 있는 거절은 타인에게 오히려 좋은 인상을 남긴다. 부탁에 반드시 응해야 하는 의무는 없지만, 부탁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나의 무심한 태도로 크게 서운할 수 있음을 생각하자. 그리고 서로의 입장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