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여 년 전,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의 폭정과 압제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들을 고통 속에서 해방해 주실 것이라는 유일한 희망이 삶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었습니다. 많은 세월 동안 그들은 메시아를 간구하고 기다리며 로마의 압제를 견뎌 왔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그토록 열망하던 메시아를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목숨은 버릴지언정 신앙은 버리지 못하던 그들이 자기들의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어쩌다가 그들이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오늘날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또다시 그러한 죄를 범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알아보려면 먼저 예수님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근본 어떤 분이신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 만물이 그(그리스도)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장 13∼18절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쓰시고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한마디만 하시면 빛이 생기고 하늘과 땅이 갈라지며 폭풍우와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는 권능의 하나님이었습니다.
3500년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낼 때 열 가지나 되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애굽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셨던 하나님이셨기에 그분이 메시아로 이 땅 가운데 오신다면 당연히 그러한 영광의 모습으로 임재하리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도 “하나님”이라 하면 그러한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예수님)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장 1∼14절
예수님 당시의 종교인들은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빛을 존재케 하셨던 창조주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다면 금방 알아볼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을 극도로 미워하며 죽이기까지 배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천만만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위엄 중에 나타나셨다면 몰라 뵈었을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일정한 틀로서 자리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정관념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인 천사보다 못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히 2장 6~8절
이스라엘 백성이 천사보다 못한 모습의 하나님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오셨건만 그들은 침을 뱉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이 자기 생각의 틀 속에 맞춰지지 않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배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설마 천사보다 못하게 오실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못한 모습으로 오시니 형제들도 믿지 않았고 친척들은 미친 줄로 생각하고 잡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기에 당시에는 믿으라는 말씀이 여러 번 강조되었습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믿기 쉬웠다면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는 이 말씀에는 그만큼 그리스도를 믿기 어려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려져 있던 하나님의 모습과 실제로 오신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비밀인 그리스도”라는 표현에 수긍할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장 26∼27절
“…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장 2~3절
모든 선지자와 복음 기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사 9장 6절, 골 1장 16절, 요 1장 1절).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 의해 처형되신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배척했던 당시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 15장 4절).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천사보다도 못한 모습으로 오실 리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서 놀랍고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 생각의 틀을 깨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그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전지전능하신 그 모습 그대로 오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동정녀의 몸을 빌려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고,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실 수도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틀을 만들어 놓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려 한다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결코 영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닭은 “꼬꼬댁 꼬꼬”하고 울고 개는 “멍멍”하고 짖으며 고양이는 “야옹”하고 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은 닭이 “퀴키리 퀴키”하며 울고 개는 “바우 와우”하고 짖으며 고양이는 “미아우”하고 운다고 생각합니다. 짐승이 나라에 따라 다르게 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라마다 짐승의 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가 다른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고 계속 그렇게 생각하며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 노랗게 보이는 꽃술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노란색이지만 개의 눈에는 흰색으로, 벌의 눈에는 붉은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이 진정한 꽃술의 색깔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감각을 우리가 얼마나 자신 있게 믿을 수 있습니까?
지구의 공전에 대하여도 우리 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지금도 지구는 시속 10만 8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도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옳고 또 자신의 감각에 느껴지는 것만이 옳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틀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우리의 감각으로는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고전 4장 5절)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제각기 성경을 풀어 해석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셔도 그들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내 생각의 틀을 만들지 말고 성경을 올바르게 볼 줄 아는 영안(靈眼)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내 생각의 틀로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관점으로 보아야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니 구원받은 사람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눈을 빌려서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장 1∼5절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인의 관점으로 보니 그리스도께서는 시온에 계십니다. 시온을 찾고 시온의 법을 알아야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시온 바깥에 있는 사람의 관점으로는 결코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이 교회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 교회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개인의 주장을 따라 성경을 바라보아도 안 되겠습니다.
벌을 비롯한 곤충의 눈이나 동물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으로 꽃술을 바라볼 때 그것이 노란색으로 바로 보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섭리 가운데 억만 분의 일이라도 이해해야만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기묘자의 모략 속에 싸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한정적인 생각과 짧은 지식으로 바라보려고 하니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의 말씀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시온에 계셨습니다. 시온이 어디이기에 어린양과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 성도들이 함께 있는지 우선 그 내용부터 찾아보겠습니다.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사 33장 20∼24절
시온은 바로 절기를 지키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온에서 함께 거하는 백성에게 재판장이시요, 율법을 세우신 분이시요, 왕이 되십니다. 세상에도 왕과 백성 사이에 통치의 도구가 되는 법이 있듯이 시온의 왕이신 하나님께도 통치하는 법인 새 언약의 율법이 있습니다.
나라마다 법이 달라 외국인이 그 나라의 법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시온의 법은 하나님 백성이 아닌 세상 사람들은 쉽게 따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율법을 선포하시는 때는 말일(末日)입니다(미 4장 1절). 말일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방법을 찾아 시온으로 몰려올 것이며 심판 때에 시온의 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시온에서 세우신 법(새 언약)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온에 거하지 않고서는 그 법을 모르기에 심판대에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속의 틀을 말끔하게 해체해 버리고 오직 성경의 인도를 따라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온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편 13~14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편 1∼3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택하여 거처로 삼으시고 그 처소인 시온에서 영생의 복을 허락하신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백성 된 관점에서 보아야 비밀 중의 큰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시온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영생의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거하는 이들의 눈을 표준으로 맞추어 두셨고 시온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모두 옳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비밀 중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시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을 주시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초대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초대장입니까?
열방 가운데 흩어져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영안을 아직 가지지 못한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어서 속히 시온으로 인도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뵙도록 눈을 열어 줍시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게 합시다. 천국으로 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을 부지런히 나누어 주어 하늘 본향에 돌아가 하나님께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