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내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하루하루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습니다(전 3장 1절). 육신의 삶을 마치고 천국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복음 생애를 돌이켜보며 후회 없이 살았노라고 자부할 수 있으려면 나날이 엘로힘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영광 돌리며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을 위해 모든 선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 가운데서도 ‘배려’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복음의 생애 동안에 아버지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배려를 우리도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실천하며 살았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옛날 어떤 나라에 눈이 애꾸인 장군이 있었다고 합니다. 격전을 앞두고 결사의 각오로 조국을 구하려던 장군은 출정 전에 마지막으로 자기 생전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를 초빙해서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정작 완성된 그림을 본 장군은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림이 잘못 그려진 것은 아니지만 후손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선조가 용맹하기도 했지만 생김새도 멋있었구나’ 하고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가려진 한쪽 눈이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명한 화가를 또 불렀습니다. 그 화가는 지난번 그림이 미적인 차원에서는 잘 그려졌는데도 장군이 다시 자신을 부른 까닭이 애꾸로 보이는 게 싫어서라는 것을 알고 두 눈을 똑같이 멀쩡하게 그렸습니다. 장군은 이번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애꾸인 모습을 남기는 것도 싫었지만 사실이 아닌 초상화를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때 어린 소녀 화가가 장군을 찾아와 초상화를 그려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장군은 반신반의했지만 전장에 곧 나가야 할 상황이라 다른 화가를 부를 겨를이 없어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소녀의 그림은 장군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림을 본 장군은 “이제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후손들이 앞으로 나를 이 모습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 아닌가!”라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소녀가 그린 초상화는 장군의 옆모습이었습니다. 그림 자체도 사실이려니와 성한 쪽의 자기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기게 되었다는 데 장군은 더없이 흡족해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의 배려이자 지혜입니다. 천재적인 화가들이 아무리 화폭에 아름답게 초상을 그려내어도 배려 없이는 장군의 마음을 채워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을 살펴주지 못하면 아무리 사실을 표현했다 해도 상대에게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길 뿐입니다. 소녀가 비록 어리기는 했지만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통찰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려란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어려움을 살필 줄 아는 것입니다. 배려가 있을 때 상대방에게 기쁨을 주고 만족을 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일컫는 진정한 사랑도 배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장 1~5, 12~13절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속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볼 때,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배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에 상대의 허물을 감싸주고 오래 참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상대방에게 온유하게 대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역시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거듭나려면 이와 같이 배려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이 제일이라 하셨는데 지금까지 나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는지 한번 돌아봅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통해서도 배려하는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폭행당하고 거반 죽게 되어 버려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근처를 지나는 행인들이 그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의롭다 칭함 받고 존경받는 제사장이 그를 보았고 얼마 후에는 레위인이 같은 장소를 지나게 되었지만 그들은 죽어가는 이를 못 본 체하고 제각기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그와 마주친 사람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사람들이 멸시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다가가서 치료한 다음, 주막에 데려가 돌봐주었으며 떠날 때에도 주막 주인에게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나중에 와서 갚을 테니 이 사람을 잘 보살펴주라는 당부까지 하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척 외면하는 사람과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는 사람 중 누가 진정한 이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눅 10장 25~37절).
하나님께서는 비유 속 사마리아인처럼 우리의 참된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우리를 외면치 않으시고 불쌍히 여겨 구원하러 다가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장 10절
하나님께서는 지옥의 형벌을 받을 자녀들을 먼저 생각하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당신의 평안함보다는 죽음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자녀들의 괴로움에 더 관심을 가지시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자녀들을 위해 육체를 입고 이 땅까지 오셔서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고 그 살과 피를 먹여 자녀들을 모두 살리시고 영생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배려하는 사랑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생도, 천국도 약속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히 2장 14~15절, 요 6장 53~58절, 마 26장 17~28절 참고).
“…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게 하심을 잊었느니라 …”벧후 1장 3~11절
하나님께서는 자녀들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배려하는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심령을 믿음과 더불어 덕과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와 사랑으로 채워나갑시다. 절제하는 생활, 인내하는 생활, 믿음 있는 생활, 형제 우애가 있고 사랑이 있는 생활에는 틀림없이 열매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덕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성경의 많은 말씀을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과 다를 바가 없으며 자기의 지난 옛 죄를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심도 잊어버리고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진홍같이 붉은 우리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하늘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큰 배려를 우리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셨습니까? 당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시고 하늘나라에만 계셨더라면 십자가의 수욕도,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인생들의 희롱과 조롱도 당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로지 천만 천사와 우주 영물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며 존귀와 영광을 누리실 하나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자녀들을 먼저 생각하셨기에 모든 고통을 참아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도 온 인류에게 배려하는 사랑을 영육 간에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시온의 성도 여러분들이 하늘 어머니의 본과 가르침을 따라서 이웃의 어려운 처지를 돌아보며 돕고 있는 이 일도 배려입니다. 이웃의 배고픔, 목마름, 아프고 힘든 형편에 관심을 가지니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웃에게 짧은 인생 동안 잠시 도움을 주는 육적인 사랑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 이웃을 영원히 도와주는 일도 영적인 배려요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잠깐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사랑도 물론 사랑입니다만 영원한 천국에 함께 갈 수 있는 사랑이 더욱 참되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친히 본보여주신 것처럼 자신의 안위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여, 영원한 멸망에서 고통당할 영혼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참아주고 천국 길로 안내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자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에는 내버려두면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거하는 인류 인생들 대부분이 강도 만나 버려져 있는 자들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이들을 보고도 그저 방관하고 지나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같이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과 같이 그들에게 관심을 두고 영혼을 살리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시겠습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무관심했습니다. 관심이 있었다면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흔들어보고, 괜찮은지 물어보기라도 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그들처럼 자기만 아는 고고한 생활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관심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점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녀들 영혼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으로 이 땅까지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위를 돌아봅시다. 영원한 하늘 세계를 모르고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영혼들에게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는, 사마리아인과 같은 은혜로운 마음을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하겠습니다. 영혼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배려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진실로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속성은 영원한 것이므로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사랑보다도 영원한 사랑을 세상 만민에게 베풀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천국에 이르러서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배려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메말라 있는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주고 천국 소망을 심어주어 모든 인류에게 영광된 천국 길을 열어주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장 7~11절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그 안에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은 연약한 여자를 강한 어머니로 만들고, 두려움에 떨던 겁쟁이도 용감무쌍한 용사로 바꿔놓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놓으셨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고, 구원받지 못할 자를 구원받을 자로 바꿔놓으시고, 연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로 바꿔놓으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불쌍한 영혼들을 ‘저 사람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니까, 저 사람은 타 종교인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내버려두지 말고 모두에게 관심을 가져,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그들을 바로 세워서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서 육신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조롱과 핍박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고통의 길을 걸으시면서도 결코 우리를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해 희생의 길을 걸어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받은 사랑을 이제 베풀 줄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교훈해주시고 몸소 실천하신 배려의 사랑을 온 세계 만민에게 전하고 실천하여 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시온의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