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나노과학연구단에서 원자 크기1만 한 저장 매체를 개발해 관련 분야의 상을 휩쓸었다. 인류는 마이크로의 세기였던 20세기를 지나, 21세기 들어 미세한 나노 기술의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1. 나노 단위의 크기. 참고로 1㎚(나노미터)는 m(미터)의 10억분의 일.
한 세기를 걸쳐 연구해 낸 미세 저장 공간의 영역이, 우리의 머리에는 옛날부터 심어져 있었다. 바로 머리카락이다.
머리카락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자라기 시작한다. 수정 후 7주에 접어들면 피부조직에서 모낭2을 관찰할 수 있다. 10~13주쯤에는 두피에서 털이 나며 20주 정도 되면 머리카락과 함께 눈썹, 솜털이 매우 뚜렷하게 확인된다. 33~37주 동안 솜털은 대부분 빠지고 머리카락은 더욱 뻣뻣해져 완연한 모습을 갖춘다.
2. 머리카락 뿌리 부분을 둘러싸고 영양을 제공하는 피부조직.
많아도 고민, 적어도 고민, 길어도 고민, 짧아도 고민…. 배아 시절부터 일평생을 함께하며 우리에게 수많은 고민을 안기는 머리카락은 왜 존재하며, 어떤 역할을 할까?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이 말해주는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털옷을 내어주고 두뇌를 지키다
생물학적으로 영장류로 분류되는 인간을 다른 영장류와 구분하는 주된 특징 중 하나는 피부에 눈에 띄는 털이 없다는 것이다. 수염이나 머리카락을 내밀어 본다 해도, 침팬지나 오랑우탄에 비해 인간의 피부는 확실히 매끄럽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동물 중 몸에 비해 뇌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크다. 뇌 조직은 체온 상승에 매우 민감해, 열사병 발생 위험이 있는 섭씨 40도에서 체온이 2도만 더 올라도 뇌사에 이른다. 생명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면 중심체온3이 과도하게 올라가기 전에 열을 내보내야 한다. 만약 인간에게도 다른 영장류처럼 두꺼운 털옷이 있었다면, 모든 열의 이동을 차단해 버려 체온 조절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3. 심장에서 흐르는 혈액의 온도. 뇌 조직의 온도를 조절함.
과학자들은 초기 인류의 피부 표면에는 털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상태로 10~20분만 걸어도 열사병을 유발했으나, 현재는 꼭 필요한 털들만 남아있다.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인간은 36.5도의 체온을 유지함으로써 뇌 조직을 보호할 수 있게 됐다.
남은 털들 중 하나인 머리카락은 인체의 꼭대기 부분을 덮고 외부로부터 뇌와 두피를 보호한다. 만약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히면, 머리카락이 1차 보호막 역할을 한다. 충격을 흡수하는 쿠션이 되어 뇌에 직접적인 영향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여름에는 강하게 내리쬐는 자외선에 두피가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가림막이 되고, 겨울에는 외부에 열을 뺏기지 않도록 차단해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한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이유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해온 머리카락은 그 역할이 무색하게 속절없이 빠져버린다. 적으면 몇 가닥, 많으면 한 움큼씩도 빠지는 머리카락. 꼼짝 않고 제자리에 있으면 좋으련만, 자꾸 떨어져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머리카락이 빠지는 일차적인 이유는 인체의 털들도 제각기 정해진 수명이 있기 때문이다. 한 나무에서 계속 피고 지는 무궁화처럼, 머리카락을 비롯한 털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빠지고 그 자리에서 다시 자라난다. 성장기(anagen)-퇴행기(catagen)-휴지기(telogen)를 반복하는 이 현상을 가리켜 ‘털의 주기(hair cycle)’라 한다. 머리카락이 성장하는 기간은 최대 6년이다. 이에 반해 눈썹·속눈썹·솜털 등은 6개월 이하의 주기를 가지며, 성장 속도도 머리카락의 반 정도이다. 머리카락에 비해 훨씬 짧게 자라는 이유다.
머리카락은 2~6년의 성장기 동안 한 모낭에서 활발히 세포분열을 한다. 보통 1일에 0.4㎜, 1개월에 1㎝, 1년에 15㎝ 정도 자라는데, 이는 성별·연령·인종·건강상태·계절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성장기가 지나 수 주간의 퇴행기에 접어들면 머리카락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세포가 죽는다. 새로운 세포로 새 머리카락을 만들기 위해서다. 더 이상의 세포분열을 할 수 없는 머리카락은 4~6개월의 휴지기 때 빠져버린다. 열심히 일했던 모낭은 다음 성장기를 준비하며 잠시 휴식한다.
보통 인간의 머리카락은 약 85%가 성장기에 있으며, 나머지 15%는 퇴행기나 휴지기의 머리카락이다. 아침마다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뱉는 경우가 많은데, 건강한 사람의 머리카락이 약 10만 개임을 고려했을 때 하루에 55~100가닥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작지만 강한 힘, 머리카락의 3중 구조
일반적으로 ‘머리카락’ 하면 떠올리는 두피 위에 드러난 부분은 모간(毛幹), 두피 밑 모낭 안에 들어있는 부분을 모근(毛根)이라고 한다. 모간의 지름은 보통 50~100㎛(마이크로미터4)로, 이 작은 세계는 다시 삼층으로 나뉜다.
4. m(미터)의 백만분의 일.
모간은 표피(cuticle), 피질(cortex), 수질(medulla)의 세 가지 구조로 결합되어 있다. 가장 중심부의 수질은 공기로 차 있는 공간으로, 공기의 양이 많을수록 모발에 광택이 생긴다. 불규칙적인 벌집 모양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굵은 모발에서 잘 관찰된다.
모간의 80%를 차지하는 피질은 머리카락의 탄력, 강도, 감촉, 색상을 좌우하는 층이다. 피질세포는 굵은 케라틴 심을 생성해 강도와 유연성을 결정한다. 모간의 색에 영향을 주는 어두운 색의 ‘유멜라닌’과 밝은 색의 ‘페오멜라닌’ 역시 피질에 있다. 일반적으로 동북아시아인은 유멜라닌, 북유럽인은 페오멜라닌이 더 많아 인종마다 머리카락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멜라닌의 양이 부족해지면 원래 색인 흰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은 속도만 다를 뿐, 누구나 똑같다.
머리카락 가장 바깥에는 두께 0.3~0.5㎛의 표피층이 있다. 케라틴 단백질의 표피세포는 비늘처럼 겹쳐져 머리카락 내부를 감싸고 열, 빛, 약품 등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한다. 표피 세포는 머리카락의 끝을 향해 약간 떠 있는데, 두피 쪽으로 올라가려는 해충들을 막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머리카락을 잡고 아래로 쓸면 부드럽게 내려가지만 그 반대로는 쉽게 되지 않는다.
이 같은 3중 구조는 머리카락을 작지만 강한 힘을 가진 기관으로 만든다. 그림형제의 동화 <라푼젤>에서는 마녀와 왕자가 주인공의 긴 머리카락을 붙잡고 탑 꼭대기에 올라간다. 동화 속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만, 머리카락 한 가닥의 힘은 생각보다 세다. 물론 굵기와 손상 정도, 영양상태, 수분함량에 영향을 받지만 머리카락 한 가닥은 150g까지 지탱할 수 있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이 총 10만 개라고 가정할 때, 이론적으로 15톤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로 알 수 있는 것
요즘은 범죄 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으로 범인을 밝히거나, 머리카락으로 친자 여부를 확인한 사례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실제로, 머리카락 한 올에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DNA 분자사슬의 순서는 사람마다 달라 지문처럼 사람을 식별할 수 있다. 화석화된 체세포로 이루어진 모근에도 DNA가 있어, 이를 추출해 유전자를 분석하면 머리카락 주인의 성별은 물론 나이나 키, 생김새와 잘 걸릴 수 있는 질병까지도 추측이 가능하다. 과거의 기술은 세포에서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리하는 수준에 그쳤으나, 최근 핵 또는 게놈 DNA를 분리하는 기술이 개발돼 머리카락에서 유의미한 DNA를 추출하는 일이 용이해졌다.
특정 약물을 복용하면 약 성분이 모세혈관을 타고 모근에 흡수된다. 모근에서부터 성장하는 머리카락을 따라 각질화된 약물도 함께 이동하므로, 머리카락 길이에 따라 성분을 검사하면 약물 복용 여부와 시기까지 알아낼 수 있다. 또한 머리카락 속의 30여 가지 미네랄과 8가지 중금속의 양을 비교 분석하여 몸속의 영양 과잉·결핍 및 불균형 상태를 평가하고, 건강을 유지할 방향을 제안하는 모발 조직 미네랄 검사(HTMA, Hair Tissue Mineral Analysis)도 있다.
정밀한 검사 없이 육안으로 머리카락을 보고 건강 상태를 짐작할 수도 있다. 머리카락은 두피에 이르는 혈액에서 영양분을 공급받아 자라기 때문에 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직립보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피까지 피를 보내기가 가장 힘들다. 이 때문에 빈혈이 있는 사람은 머리카락에 영양 공급이 부족해져 탈모가 일어나기도 한다.
평생 동안 한자리에서 나고 자라기를 반복하며 두뇌를 보호하고, 무수히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머리카락. 그 가느다랗고 세밀한 영역에 담긴 힘과 정보의 양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장 28~31절
- 참고자료
- 박철원, 『탈모, 발모, 머리카락 세포』, 북랩, 2013.
- 커트 스텐, 『헤어-꼿꼿하고 당당한 털의 역사』, 하인해 역, MID, 2017.
- 이화영, 「라푼젤도 모르는 머리카락의 비밀」, 『어린이과학동아』, 2011년 0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