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의 지혜, 아포프토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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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한여름에 푸름을 자랑하며 울창한 숲을 만들던 나무들도 하나둘 잎의 색을 바꾼다. 단풍은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절경을 선물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우리가 보기에는 떨어지는 낙엽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이지만 나무에게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 과정의 하나다. 날씨가 추워지면 나무는 충분한 물과 영양분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나뭇잎을 떨어뜨려 이듬해 봄을 준비한다. 낙엽이 자리를 비워주기에 봄이 되면 새싹이 새로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을에 잎이 떨어지는 것과 비슷한 작용이 우리 몸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바로 세포의 예정된 죽음, ‘아포프토시스apoptosis’다. 아포프토시스는 식물의 푸른 잎이 말라 떨어지거나 꽃잎이 떨어지는 모양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나무가 새잎을 움트고 꽃을 피울 봄을 준비하기 위해 제 잎을 스스로 떨어뜨리듯, 개체 전체를 위해 세포 스스로 사멸의 길을 택하는 세포의 예정사(豫定死)를 아포프토시스라 한다.

아포프토시스와 구별되는, 화상이나 타박상 등의 환경적 요인에 의한 세포의 괴사(壞死)는 네크로시스necrosis라 한다. 아포프토시스를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나뭇잎에 비유한다면 네크로시스는 물이나 영양분의 부족으로 잎이 갈색으로 변하여 죽는 것과 같다. 화상을 입은 피부나 타박상으로 멍든 부위가 바로 세포가 괴사한 부분이다.

세포 예정사와 괴사는 세포의 사멸 과정이 뚜렷하게 다르다. 세포에서 괴사가 일어나면 환경적 변화로 세포 안팎의 삼투압 차이가 커진다. 그러면 세포 밖의 물이 안으로 급격하게 유입되면서 세포의 부피가 늘어나고 세포소기관은 부풀어 커진다. 그러다 결국 세포막이 터져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세포 내 물질들이 밖으로 노출되며 염증을 일으켜 주위 세포들까지 해를 입기도 한다.

반면, 아포프토시스는 세포 내에 숨어 있는 특수한 단백질들과 유전자의 작동으로 시작된다. 즉, 세포 내부의 장치가 발동해 일어나는 것으로, 이 프로그램은 유전자에 적혀 있다. 인체의 세포 예정사에는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하지만 중요한 역할은 p53 유전자가 맡고 있다. 사람의 염색체 23쌍 가운데 17번째에 있는 p53 유전자는 세포의 DNA가 심각한 손상을 입으면 아포프토시스가 일어나도록 시동을 켠다.

세포는 개체 전체를 위해 아포프토시스를 선택한다. 하나의 수정란에서 시작하여 증식과 분화를 반복하며 조직과 기관을 형성하는 발생과 분화 과정에는 정해진 시기에 결정된 수만큼의 세포가 없어져야 몸의 형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기 위해 일어나는 세포 예정사를 PCDProgrammed Cell Death라고 하는데,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할 때 꼬리가 없어지는 현상을 예로 들 수 있다. 올챙이 꼬리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유전자에 저장된 대로 적정 시기에 아포프토시스 과정을 시작한다. 사람의 손가락도 마찬가지다. 엄마 배 속의 태아는 원래 손과 발이 주걱처럼 뭉툭한 형태로 생겨난다. 이후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세포들이 없어지면서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이다.

올챙이의 꼬리처럼 미리 저장된 세포의 희생뿐만 아니라 상해를 입은 세포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도 아포프토시스라고 한다. 세포가 심각하게 훼손돼 암세포로 변할 가능성이 있을 때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세포 스스로 사멸을 선택하는 것이다. 세포는 방사선, 화학물질, 바이러스 등에 의해 유전자 변형이 심하게 일어나면 주변 세포에 피해를 주기 전에 스스로 세포의 예정사를 가동시킨다.

아포프토시스가 작동되면 괴사와는 반대로 세포는 쪼그라들고, 핵 내부에서는 DNA가 규칙적으로 절단되며 핵은 응축한다. 사멸 과정에서 최대한 주변 세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쓸모 있는 물질들은 세포막 주머니에 담아 주변 세포에 전달하고 나머지는 작은 조각들로 나뉜다. 주변의 식세포가 완전히 단편화된 세포 조각들을 먹어 치우면 일련의 과정이 마무리된다.

그러나 아포프토시스에 문제가 있는 일부 세포는 암세포로 변하기도 한다. 암세포는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특징이 있다. 정상 세포가 일정 수준만큼만 증식하고 더는 증식하지 않는데 반해, 암세포는 주변의 산소와 영양분을 독식하며 끊임없이 증식한다. 이 때문에 인접한 정상 세포들은 영양분이 부족하여 조직이 괴멸하게 된다. 문제 세포들은 정상적인 주변 세포들을 죽이고 다른 곳으로 옮아가기도 한다. 암세포는 개체의 생명을 앗아갈 때까지 증식을 멈추지 않는다.

세포를 배지에 배양하면 정상 세포는 최대 50회 분열한 후 아포프토시스를 작동시켜 사멸한다. 반면 아포프토시스를 완전히 잃어버린 암세포는 조건만 맞으면 무제한 증식한다. 자궁경부암 환자의 암세포를 배양한 ‘헬라HeLa 세포’는 세포의 주인인 헨리에타 랙스가 사망하고 60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증식하여 약 오천만 톤이 배양되었다. 이러한 원리를 이용해 아포프토시스를 회피하는 암세포를 없애기 위하여 방사선이나 화학요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암세포에 강제로 아포프토시스를 유도하는 치료 방법이 연구 중이다.

없어져야 할 세포가 계속 존재한다면 온전한 형태를 갖춘 기관은 형성될 수 없다. 태아는 손가락들이 서로 붙어 있는 합지증을 앓게 될 것이고, 개구리는 올챙이 꼬리를 매단 채 살아야 할 것이다. 혈액 속에는 기능을 잃은 적혈구가 넘쳐나게 될 것이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 중의 하나인 암은 자기 신체의 일부였던 세포가 아포프토시스 과정을 잃고 서서히 암세포가 되며 발생한다. 아포프토시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상 세포는 결국 암세포로 변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우리도 비워야 할 것들을 애써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인체에 프로그래밍 된 비움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이다.

참고
『만물의 죽음-되돌아보는 삶과 죽음』 (오바라 히데오 著)
『생명의 미학-어느 생화학자의 뜻으로 본 생명』 (박상철 著)
『세포들의 반란』 (만프레트 라이츠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