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에 나섰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함경남도 흥남 지역에 고립되자 해상으로의 철수를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적군이 포위망을 좁혀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흥남부두는 군인과 피난민이 뒤섞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철수할 병력만 10만이 넘는 데다, 차량 1만 8천 대, 전투물자가 35만 톤. 그러나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위한 구출 계획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이에 현봉학 미 제10군단 민사고문은 군단장 알몬드 장군을 찾아가 오갈 데 없는 피난민을 도와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국군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도 “피난민을 배에 태워주지 않는다면 그들과 함께 육로로 철수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승선시키라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이때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정원 60명을 훨씬 초과하는 1만 4천여 명을 태워, 후에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이 빛나는 이유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피난민을 살리기 위해 애쓴, 영웅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