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홍두깨

한국,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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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계획이 있어 틈틈이 집 정리를 하던 중, 한날은 밤늦도록 주방을 정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냉장고를 청소하면서 그간 방치해둔 페트병을 끄집어내어 내용물을 확인하려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펑’ 하고 굉음을 내며 속에 있던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면서 천장으로 솟구쳤습니다. 복분자 발효액이 오래되어 터진 것이었습니다.

주방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불그죽죽한 복분자 발효액으로 온통 범벅이 돼버렸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습니다. 거실에서 TV를 보다 주방으로 달려온 남편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이내 사태를 파악한 남편은 재빨리 걸레를 가져와 얼룩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깰까 봐 남편이 발걸음을 조용조용 움직였지만, 페트병 열리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잠귀가 어두운 딸들도 자다 말고 놀란 얼굴로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진정시키고는 아빠를 도와 주방을 치웠습니다. 그렇게 가족의 도움으로 주방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제 마음도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날 가족에게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남편과 아이들은 한밤중에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느냐고 원망하거나 짜증 내지 않고 더럽혀진 주방을 묵묵히 치워주었습니다. 마치 자신들의 과오로 빚어진 일인 듯 되레 저를 위로하며 제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준 가족에게 너무 고맙고 미안했습니다. 이번 일로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언제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로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가족이라는 사실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