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부는 날이면

한국 군포 최재정

조회 6,500

나는 비가 오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중충한 날씨를 보면 기분이 가라앉는 것도 그렇지만 옷과 신발이 젖어 축축하기 때문이다. 기상청도 울고 갈만큼 정확하게 비를 예보하는 관절 때문에 신경통에 시달리는 것도 싫은 이유 중 하나다. 그런 내가 빗속을 걸으며 피식 웃음 지을 때가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나는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다. 시골이긴 해도 우리 집은 면 소재지의 중심에 있었다. 집이 학교와 가까워서 가끔 학교 운동장에 나오면 엄마가 옥상에서 빨래 너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30분은 기본이고 한 시간 넘게 걸리는 아이들도 적잖았던 그 시절에 나는 좋은 조건 속에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굵은 빗방울에 바람까지 더해져 힘겹게 운동장을 지나 집으로 향한 적이 있다. 체격이 작아 등에 멘 가방과 같이 학교를 다닌다는 말을 들었던 나로서는 비바람을 헤치며 걷는 게 쉽지 않았다. 자꾸 나를 밀어내는 바람 때문에 애를 먹고 있는데 저만치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아빠였다.

“우리 막둥이 바람에 날아갈까 봐 와봤다.”

늘 일이 바빠 좀처럼 함께하기 어려웠던 아빠였기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빠를 따라 집으로 왔다.

몇 년 뒤, 나는 도시로 전학해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지만 이따금 비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아빠는 전화로 나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 바람에 안 날아가고 집에 잘 왔느냐는 진담 반 농담 반의 우스갯소리를 건네시면서.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나는 비바람 정도는 거뜬히 물리칠 만큼 막강한 아줌마 파워(?)를 지니게 됐지만 비바람이 부는 날이면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우리 막둥이 무사히 집에 잘 왔느냐는 아빠의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