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할 때 사용한 언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려준 가장 신성하고 성스러운 선물에 깃든 복잡성과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2000년 6월 26일,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이 발표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과학계 최대의 이슈였던 인간 게놈 프로젝트 초안의 완성을 선언하며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외심마저 느끼게 했던 인간 유전자의 비밀을 파헤쳐보자.
유전자, 비밀의 열쇠
‘게놈genome’이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가 합쳐진 말로, 한 생물이 갖는 모든 유전 정보를 말한다. 즉, 인류의 인간 게놈 초안 완성은 우리 몸의 완전한 청사진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새로운 의약품을 쉽게 개발하고, 미래의 질병을 예측하며, 유전자 치료로 난치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등 인간 게놈 정보가 생명과학 분야에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래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이를 ‘생명의 언어’라고 표현했다.
사람의 세포 속에는 23쌍의 염색체가 들어 있다. 염색체란, 유전자를 담고 있는 DNA가 실타래처럼 촘촘히 뭉쳐진 것으로 개인마다 다르나, 같은 사람이면 몸의 어느 세포에서든지 똑같은 염색체 세트를 보유하고 있다. X자 모양의 염색체들을 모두 풀면 그 길이만도 2미터에 달하는 DNA가 나오는데, 4마이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세포핵 속에 매우 세밀하게 접혀 들어가 있다.
유전자의 본체인 DNA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구조를 밝혀낸, 아주 작은 물질이다. 하지만 그 모양은 신비할 정도로 정교하다. 꼬인 사다리처럼 생긴 이중나선 구조의 DNA는 사다리의 발판에 해당하는 염기들의 배열로 유전 정보를 저장한다. 아데닌, 티민, 시토신, 구아닌의 총 네 가지 염기들은 앞글자만 따서 주로 A, T, C, G로 부른다. A는 T, C는 G와 반드시 짝을 이루어 결합하기 때문에 서로 상보적이다. 그래서 반으로 가른 DNA의 한쪽을 없애도 정보가 반대편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대로 복구할 수 있다.
약 30억 개의 염기가 길게 늘어선 인간 게놈은 1초에 하나씩 밤낮 쉼 없이 읽어도 꼬박 95년이 넘게 걸린다. 사람의 DNA 염기 서열 모두를 A4용지에 2,000자 분량으로 인쇄하면 약 150만 장, 두께만도 약 225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가장 오래된 정보 저장고
DNA가 유전 정보를 저장하는 방법은 컴퓨터가 디지털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컴퓨터는 모든 정보를 0과 1, 두 숫자만으로 나타내는 이진법으로 기억한다. 전기가 ‘흐르지 않음’을 0, ‘흐름’을 1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DNA도 네 가지의 염기로 모든 유전 정보를 저장하고 있어 4진법과 유사하므로 다양한 정보 저장 매체와 충분히 호환이 가능하다.
디지털 데이터는 CD나 하드디스크 같은 매체에 기록되는데, 수십 년이 지나면 상당 부분 손상이 불가피해서 주기적으로 다시 기록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현대에 들어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면서 더욱 강력한 데이터 저장 장치가 필요해졌다. 2020년이 되면 디지털 데이터의 총량이 무려 약 44제타바이트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이는 44조 기가바이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다.
반면 DNA는 수만 년의 시간이 흘러도 저장된 유전 정보를 고스란히 보존할 만큼 안정적인 물질이다. DNA 1그램에는 약 1021개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수의 염기가 들어있다. 이를 메모리로 환산하면 약 10억 테라바이트에 해당한다. 분자 수준의 작은 공간에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아주 오랫동안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
디지털 정보 저장 방식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DNA를 정보 저장 매체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유럽 생물정보학연구소EBI는 네이처지에 739킬로바이트의 음성, 이미지, 텍스트 파일 등 다양한 유형의 데이터를 염기 서열로 전환해 DNA 가닥에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기록된 데이터를 다시 불러와 복원하는 것도 가능했다.
생명의 암호, DNA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DNA라는 공통의 언어로 생명을 영위하며 자손에게 생명을 물려준다.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DNA의 염기 암호들은 어떻게 우리의 뼈와 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신체를 구성하고 생명 활동을 돕는 단백질의 설계도인 DNA는 생산 공장에 유전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복사본을 만든다. DNA는 훼손돼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기에 직접 핵 바깥으로 이동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복제하여 내보내는 것이다.
DNA가 복사되는 모습은 가운데가 벌어진 고장 난 지퍼를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DNA의 염기 사이가 떨어진 뒤, 단백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특정 부분만 효소들에 의해 한 가닥의 RNARibonucleic acid, 리보핵산로 복사되는데, 이를 mRNAmessenger RNA라고 한다. DNA가 대출이 금지된 원본 책이라면 mRNA는 이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복사한 것이 되는 셈이다. DNA의 복사본인 mRNA는 핵 바깥으로 나가 단백질 생산 공장인 리보솜과 합체한다.
리보솜은 mRNA의 유전 정보대로 알맞은 아미노산을 결합시켜 단백질을 생산한다. 염기의 배열 순서가 바로 유전 정보인데, 염기서열 3개가 하나의 특정한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암호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DNA의 염기서열 ATG는 단백질 합성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메티오닌이라는 아미노산을 불러온다.
염기 3개가 모여 하나의 아미노산을 지정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총 64개의 암호를 만들 수 있다. 이는 단백질의 재료가 되는 20종의 아미노산보다 많다. 그래서 서로 다른 암호가 똑같은 아미노산을 지정하기도 한다. DNA의 염기서열 GGG, GGC, GGA, GGT는 글리신이라는 같은 아미노산을 암호화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단백질이 세포의 기능과 성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2003년 4월 14일, 드디어 인간 게놈 지도가 99.99퍼센트의 정확도로 완성됐다고 최종 발표됐다. 그러나 모든 생명 현상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자부했던 과학자들은 완성된 DNA 염기서열을 해독하다가 얻은 뜻밖의 결과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10만 개 이상으로 예상했던 유전자는 3만 개 정도에 불과했고 DNA의 약 98퍼센트가 단백질을 만드는 데 있어서 전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정보였던 것이다. 답을 찾은 줄 알았더니 또 다른 문제지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로버트 워터스톤 박사는 “마침내 우리는 하나의 세포를 어른으로 만들고 무덤에까지 이르게 하는 생명의 설계도를 갖게 됐다. 하지만 설계도는 난해한 언어로 쓰여 있고 우리는 이제 막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계속된 연구로 정크 DNA라고 불렸던 이 DNA가 생명 현상에 있어서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되지만, 자세한 메커니즘은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게 없다. 또, 개별 유전자의 기능을 규명하고 DNA로부터 만들어진 단백질의 구조를 밝혀 실제 질병 치료와 예방에 응용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DNA에 담긴 생명의 언어를 해독하는 ‘포스트 게놈 프로젝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난 400여 년간 생물학의 역사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해부학으로부터 시작되어 생리학, 발생학, 생화학을 지나 이제는 세포 안을 들여다보고 유전자 속에 담긴 정보를 읽고 해석하는 지점까지 와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으로 진일보한 생명과학은 인간 유전자를 완전히 정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매우 단순한 듯 보였던 이중나선 구조의 DNA와 유전 법칙은 알면 알수록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인간을 과학적 지식으로 이해하면서 단조로운 것으로 판단 내리는 과오를 저지른다. 그러나 과학은 만물의 원리, 그 안에 담긴 질서의 복잡성과 완전성을 통해 창조주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