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하는 가정이 행복하다!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을 고려해서 말하고,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대화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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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가거나 외국인을 만나기가 두려운 이유로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것만큼 답답하고 곤란한 일도 없다. 하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말이 안 통해 답답할 때가 있다. 그 대상이 남이라면 피해버리면 그만이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과는 가까이하게 마련이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는 자연히 멀어지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평생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하는 것보다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 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배우자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족 간의 원만한 대화는 행복의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없는 가정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이유가 ‘서로 말이 안 통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다수다. 말이 안 통하면 입을 다물게 된다.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느라 언쟁을 벌이는 가정보다 실상 더 위험한 가정은 말문을 닫고 사는 가정이다.

통하는 부모와 자녀

『엄마, 토끼가 아픈가 봐요. / 쪽지 시험은 100점 받았어? // 아까부터 재채기를 해요. / 숙제는 했니? // 당근도 안 먹어요. / 일기부터 써라!』

‘말이 안 통해’라는 제목의 동시다. 대화가 매번 이런 식이라면 아이의 머릿속에 엄마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대화의 문을 닫아버리고 말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하거나 훈계 또는 지적을 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오해한다. 대화는 청중을 향해 일방적으로 말하는 연설이 아니다. 탁구를 치듯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것이 대화다.

여성가족부에서 부모 1,000명과 초등생 63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부모와 자녀 모두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대화를 많이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라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화다운 대화, 자녀가 만족하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친밀감이 형성되어야 한다. 냉랭한 분위기에서 “아빠와 대화 좀 하자”라고 한다면 아이는 의기소침해져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부모가 자녀와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함께하는 것이 좋다. 운동이든, 놀이든, 나들이든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할 수 있다. 자녀와 대화를 나눌 때는 부모가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자녀가 말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유도하되, 말할 기회를 준답시고 꼬치꼬치 캐묻거나 심문하듯 질문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너는 왜 그러니’, ‘너는 이렇게 해야 돼’ 식의 화법을 ‘너-메시지’라 한다.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면 “옷 좀 제대로 입을 수 없어? 꼬락서니 하고는⋯”, “이게 방이니, 돼지우리니?”처럼 비난·조롱하는 말, “엄마 말 안 들으면 용돈 깎는다”,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다 갖다 버릴 거야”와 같은 경고·협박성 발언, “지금 당장 씻어”, “불평하지 마”와 같은 명령·지시조의 말을 내뱉기 쉽다.

같은 말이라도 ‘나-메시지’로 바꾸어 자신의 생각과 느낌, 바람을 이야기하면 훨씬 부드럽게 말할 수 있어 듣는 사람도 거부감이 줄어든다. “엄마는 네가 옷차림을 단정히 했으면 좋겠구나”, “아빠는 네가 정리정돈을 잘했으면 해”, “불만이 있으면 짜증 내지 말고 얘기해주길 바라”와 같은 화법이 ‘나-메시지’다.

아이와 통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아이의 뜻에 따라주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아이의 뜻을 존중하되, 잘못된 사고와 행동에 대해서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알아듣기 쉽게 일러주고 훈육해야 한다.

사실, 아이와 완벽하게 통하는 부모는 없다. 아이도 자신의 생각이 있는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때때로 부모와 아이가 대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건 부모가 아이와 대립하는 상황에서 감정을 절제하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며 원만하게 풀어나가는 것이다.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대화로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소신을 가지고 노력하다 보면 자녀도 “엄마(아빠)는 나랑 잘 통해” 하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통하는 부부

A)

“아우, 국물이 좀 싱겁네.”

“짜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

“짜게 먹고 싶다는 게 아니라 싱겁다고.”

“제 입맛에는 딱 맞는데요?”

“그건 당신 입맛이고, 나한테는 싱거워.”

“당신 입맛이 까다로운 거예요.”

“까다롭긴 뭐가 까다로워!”

“그럼 당신이 직접 끓이든가요.”

B)

“여보. 저녁 차리느라 고생 많았네요.”

“뭘요, 어서 드세요.”

“국물이 맛있네. 근데 간을 좀 더했으면 좋겠어.”

“간을 보긴 했는데, 많이 싱거워요?”

“간장을 약간 더 넣으면 훨씬 맛있을 것 같아.”

“그래요? 조금만 기다려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담부턴 더 신경 쓸게요.”

A와 B 중 어느 부부가 대화가 잘 통할까? A부부는 서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말하니 대화가 통할 리 없다. 반면 B부부는 말에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져, 자칫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도 사랑과 신뢰를 쌓는 기회로 만든다.

부부간의 다툼은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대화 방법이 서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서툰 대화 과정 속에 한 사람이 버럭 화를 내면 그때부터 싸움은 불붙기 시작.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당신이 그렇지 뭐” 하고 비꼬거나, “말을 말아야지” 하고 회피하면 대화는 단절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확신하면 한 걸음도 물러나기 어렵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상대방이 오해한 거야.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니까 그래’ 하고 상대방의 성격 탓으로 치부해 버리면 대화의 장벽만 높일 뿐이다. 판단은 상대방의 몫이다. ‘비록 나는 좋은 의도였을지라도 상대방이 불쾌해한다면 내 잘못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양보할 마음이 생긴다.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노력도 사랑의 범주 안에 속한다. 어떠한 경우에든 자신을 절제하며 온화한 말투로 대화에 임할 때 부부의 사랑과 신뢰는 깊어지고, 말이 잘 통하는 부부가 될 수 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이 정도로 얘기하면 알아듣겠지’라는 생각에 앞뒤 다 자른 채 쉽고 간단하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늘어놓아 가며 장황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생략된 부분이 많아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말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듣는 사람이 피곤해할 수 있다. 대화를 하다 보면 말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듣는 사람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을,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한때 유행하던 ‘답정너’라는 말이 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뜻의 신조어로, 상대방의 의견을 묻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아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을 두고 남편에게 “맛있어요?”라고 물어보는 경우 “맛있다”는 대답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애교에 속하는 편. 매번 머릿속에 답을 정해놓게 되면 상대방의 대답은 모두 오답이 되고, 틀린 것을 인정할 수 없으니 내 생각을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면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언제나 내가 옳다’는 생각, 상대방이 말할 때 귀 기울여 듣기보다는 말을 자르고 반박하거나 그다음에 내가 할 말을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말 안 해도 통하는 가정이 가장 이상적인 가정이라지만 그 말의 속뜻은 말이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이 잘 통한다는 뜻이다. 그런 이상적인 가족이 되기까지는 시행착오도 겪어야 하고 끊임없는 대화로써 신뢰와 공감대를 쌓아나가야 한다.

내 안에 내가 가득하면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야말로 꽉 막힌 사람이 되고 만다. 속이 텅 비어 있는 관악기가 관 속으로 공기가 통하면서 맑고 깊은 소리를 내듯, 사람의 마음도 다른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은은한 소통의 울림을 낼 수 있다.

나를 비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맞춰 가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