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건네준 음료를 마시고 봉변을 당하는 일이나, 공공기관을 사칭한 전화에 속아 거액을 송금하는 일은 이제 뉴스거리도 안 될 만큼 서로 속이고 속는 일이 만연한 시대가 되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무색해진 지 오래, 가까운 이웃까지 불신의 대상이 되어 문을 꽁꽁 걸어 잠근 채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서로를 믿지 못하다 보니 타인의 작은 호의조차 경계하며 의심부터 하는 일은 당연해졌고, 24시간 작동하는 CCTV가 넘쳐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태에 가족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듯, 배우자의 차량에 위치추적기를 설치하기도 하고 마땅히 해야 할 효도를 계약서로 문서화하기도 한다. 2017년 11월 어느 시장조사 전문 기업에서 전국 만 13~5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가족관계와 관련해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내가 잘못을 하더라도 가족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66.9%에 지나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가 믿지 못하면 나라가 불안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믿지 못하면 집안이 화목하지 못하며, 형과 아우가 믿지 못하면 정(情)이 친해지지 않고, 친구끼리 믿지 못하면 사귐이 소원해진다.”
명심보감 익지서(益智書)에 나오는 말처럼, 서로를 믿지 못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인간관계의 바탕은 신뢰다. 특히 가족 간의 신뢰는 더없이 중요하다. 가족 간에 신뢰하는 마음이 있어야 대화의 문이 열리고, 진실한 대화를 통해 행복과 만족감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신뢰로 단단해지는 가정
“너 또 숙제 안 했지? 엄마가 모를 줄 알아!” “어휴, 당신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너는 꼭 잔소리를 해야 말을 듣니?” “당신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안 믿어.”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가정은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다. 비꼬는 말, 의심하는 말, 명령과 강요, 책망 섞인 말 등 불신이 담긴 부주의한 말들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그러한 말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는 유대감이 형성될 수 없다.
부부는 사랑과 신뢰로 맺어진 인연이기에 신뢰에 금이 가면 사랑도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서로 신뢰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배우자에게 불만족스러운 점이 발생하더라도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작은 갈등도 원만하게 해결하기 어렵다.
부모의 신뢰는 성장기 자녀에게 큰 영향을 준다. 어린 시절 부모의 격려와 신뢰를 받은 아이는 자존감이 높고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배운다. 그러나 부모의 신뢰를 받은 경험이 적고 부모에 대한 믿음이 약한 아이는 자존감이 낮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핑계를 대며 거짓말을 하게 된다.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반항심으로 이어져, 부모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고 싶지 않은 심리까지 발동한다.
자녀나 배우자가 대화를 꺼려하거나 가족 간에 정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면 먼저 신뢰 회복부터 해야 한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를 믿으면 어떤 말도 털어놓을 수 있고 갑작스럽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부탁하더라도 쉽게 응할 수 있다. 신뢰는 가정에 생각지 못한 고난과 역경이 닥쳤을 때 가족으로 하여금 함께 힘을 모아 헤쳐나갈 수 있게 하는 크나큰 자원이다.
믿어주면 믿음직해진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 교수는 한 초등학교에서 전교생의 지능지수를 검사한 후 담당 교사에게 일부 학생들의 명단을 주며 “IQ가 특별히 높고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8개월 뒤, 명단에 있던 학생들은 실제로 다른 학생들에 비해 학업 성적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사실, 교사에게 준 명단은 IQ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뽑은 것이었다. ‘명단에 있는 학생들은 발전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교사의 믿음이 그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1954년, 하와이 군도의 카우아이섬에서 800여 명을 대상으로 ‘가정과 사회·경제적 환경이 사람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대규모 조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그 섬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알코올 중독자와 비행 청소년 문제도 심각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조사 대상자가 태아일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생활을 조사·연구하였는데, 가장 열악한 환경에 속한 201명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이들은 훗날 사회부적응자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고위험군 201명 중 72명은 문제없이 바르게 성장했고, 명문 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바로, 어떤 상황에서든 믿고 사랑해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신뢰와 격려를 받는 사람은 ‘회복탄력성’이 높다. 회복탄력성이란, 역경과 시련이 닥쳤을 때 이를 이겨내고자 하는 힘을 말한다. 가족이든, 선생님이든, 친구든, 사람은 자신을 믿어주는 누군가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믿음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
믿어주는 것은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걱정과 염려가 담긴 열 마디 잔소리보다 “나는 너를 믿어”라는 한마디 말의 효과가 더 크다. 어설프고 영 미덥지 않더라도 일단 믿어주면 믿음직한 사람이 된다. 적어도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만큼은.
믿어준다는 것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을 사실로 여길 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 능력을 지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상대방이 나의 기대나 기준치에 부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는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가령, 시험 기간에 열심히 공부하는 자녀를 보고 성적이 오를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우, 부모가 실망한 나머지 자녀를 책망한다면 진정으로 자녀를 믿어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자녀를 믿었다기보다 자신의 기대를 믿었던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믿는다면 그 사람이 때로 거슬리는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이면에는 좋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다. 엄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이가 물병을 들고 컵에 물을 따르다 쏟았을 때, 엄마는 아이로 인해 짜증이 날 수 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에게 물을 따라주고 싶었던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 표면적인 부분만 바라보지 말고 숨은 의도를 알아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조차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하며 무조건 두둔하라는 뜻은 아니다. 믿어주는 것과 두둔하는 것은 다르다.
사실,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일은 쉽지 않다. 믿기 위해서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고, 참고 인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로는 믿는다 하면서도 사사건건 간섭하고 안달복달한다면 상대방은 자신을 믿어준다고 생각할 수 없다.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는 기뻐하고 추켜세우다가도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 몰아세우는 일도 마찬가지. 믿는다면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믿어주고 있다는 나만의 생각이 아닌, 상대방도 그 사실을 충분히 느끼고 인지하는 것이다.
가족은 언제나 믿어주어야 하는 존재, 끝까지 신뢰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존재다. 아무 효험 없는 약이라도 진짜 약으로 믿고 복용하면 실제로 약효가 나타난다는 ‘플라세보 효과’처럼, 가족을 향한 긍정적인 믿음은 그 효험이 확실하다.
가족의 무한한 신뢰를 받는 것, 언제라도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려면 가족이 나를 무조건 믿어주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가족에게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잦은 거짓말, 불성실함,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일삼는다면 신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가족을 끝까지 믿어주고 나를 믿어주는 가족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할 때 가족 간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