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오래전부터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좋은 음반을 모으는 게 취미이자 낙이었죠. 학업에 몰두하던 학창 시절에도, 외로운 유학생 시절에도 음악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즐거움과 감동, 희망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지금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단연 새노래입니다. 엘로힘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노래에는 영혼을 감동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수년 동안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살피면서도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게 구원의 진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준 것 역시 새노래였습니다.
샌디에이고에서 교수직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잠시 미국에 온 모친이 세 살배기 손주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는데 교민이 밝게 인사를 하더랍니다. 한국인이 거의 없는 동네에서 한국말이 들려 무척 반가웠다고 하더군요. 낯선 도시에서 사람과 정이 그립던 저희 가족은 그분과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그분은 여느 교포들처럼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한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하나님의 교회, 그것도 차로 서너 시간을 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냥 가까운 교회를 다녀도 될 텐데 뭐가 다를까 싶었습니다. 들어보니 달랐습니다. 성경 말씀을 위주로 설교하는 것도, 하나같이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것도요. 석사 학위를 받으려고 머물렀던 캐나다에서 한인 교회를 다녔고 미국에 와서도 그랬지만 설교는 대개 목회자의 주관적인 의견과 경험에 기반했고, 신자들의 모임은 친목과 사업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신앙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하나님의 교회에서 배우는 성경 말씀은 신선했습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선교사님을 비롯한 교회 분들은 먼 길을 달려와 말씀을 알려주었습니다. 진리를 상고하며 제 나름대로 요약 정리한 노트만 해도 십수 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으로는 받아들여지는 말씀이 가슴까지 와닿지 않았습니다. 특히 재림 예수님이 동방 땅끝 나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 오셨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나라 중에 왜 한국일까, 물론 성경 예언을 보면 의문이 풀렸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아들이 교회를 워낙 좋아하기에 함께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집과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교회가 생겼습니다. 아담한 하우스처치에서 시작해 얼마 뒤에는 번듯한 성전이 세워졌고요. 처음에는 드넓은 성전에 맨 앞 세 줄 정도만 식구들이 앉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나둘 늘어나는 성도들로 빈자리는 빠르게 채워졌습니다. 예배 때 팔짱을 끼고 맨 뒤에 앉아 저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절절히 진리를 받아들이지? 내가 놓친 게 뭘까?’
그렇게 3년쯤 지났을까요. 어느 안식일에 준비 찬송을 부르는데 불현듯 묵직한 감동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습니다. 죄인 된 나를 구원하시려 육체의 가시 옷을 입고 이 땅까지 오신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 하늘 부모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집약된 새 언약의 진리, 형제자매와 시온에 거하는 행복⋯. 새노래 가사에 구구절절 담긴 진리와 은혜가 깊은 깨달음으로 어우러져 가슴을 울리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왜 동방에 오셨을까’ 하는 의문은, 광활한 지구에서 나와 가까운 곳에 와주셨다는 감사로 바뀌었습니다.
이 자녀가 깨닫기를 길이 기다려주신 아버지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에 사무치도록 감사했습니다. 당시 저는 시쳇말로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더 높은 수준의 연구와 강의를 요구하는데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쫓기는 듯한 일상에 스트레스가 잔뜩 쌓였습니다.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습니다. 그랬으니 진정 마음을 의지할 분이 생겼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를 괴롭히던 고민과 걱정은 사소하게 여겨졌습니다.
저와 달리 일찌감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식구들은 아직 시온이 세워지지 않은 주(州)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부족하나마 저도 그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휴일이면 피닉스, 투손 등 가까이는 세 시간, 멀게는 대여섯 시간 걸리는 도시로 가서 식구들과 함께 열심히 새 언약 진리를 전했습니다. 휴가 때는 2주 정도 단기선교에 참여해 원 없이 복음을 외쳤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한 청년에게 유월절에 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의 반응이 특이했습니다. 말씀이 맞다, 틀렸다, 믿는다, 믿기지 않는다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아예 외면하지는 않기에 이후로 몇 달간 휴일마다 그 지역으로 가서 인내심을 갖고 말씀을 알려주었습니다. 청년은 어느 시점부터 진리를 수긍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엘로힘 하나님을 영접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누르고 차근차근 한 말씀 한 말씀 알려주며 기다렸습니다. 저 역시 진리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데 몇 해가 걸렸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저를 기다려주신 세월을 생각하면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청년이 “만약 제가 침례를 받는다면 이곳까지 와주실 거예요? 저는 부모님도 초대해서 축하받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눈빛에서 뭔가 결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곳으로 와주셔야겠어요.”
“갑자기요? 무슨 일 있나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이유, 알고 계시잖아요.”
마침내 엘로힘 하나님을 영접한 청년은 자신의 부모님과 시온 가족들의 축하 속에 참된 신앙의 첫발을 뗐고, 하늘 아버지 어머니를 닮은 목회자를 꿈꾸다 그 소망을 이뤘습니다.
그렇게 한 영혼 한 영혼이 인도됐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축복으로 인도한다는 것,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다는 것은 실로 가슴 벅찬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복음에 담긴 가치를 깨달았기에 기존 식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새 식구들까지 잠자고 쉬는 시간을 아껴가면서 영혼 구원의 사명에 헌신했겠지요.
제가 침례를 받았을 때만 해도 미국에 시온은 뉴욕에 하나, 캘리포니아에 서너 곳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들어본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성경 말씀을 전하는 아시아인을 다들 생소하게 바라봤습니다. 지금은 알래스카와 하와이까지 50개 주에 시온이 없는 곳이 없고, 수많은 정부 관계자와 각계 인사들, 시민들이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 사랑이 많은 교회, 봉사를 잘하는 교회”라며 치켜세웁니다. 불과 2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새노래 가사처럼 ‘작은 정성을 크게 여겨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통해 원대한 역사를 신속하게 이루시고, 더디 깨닫는 저로 하여금 그 과정을 생생히 목도하게 하시며 믿음을 더욱 굳게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모든 과정은,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필요치 않은 게 없었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을 떠난 지 4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복음이 어느 정도 발전했으니, 나도 이제 혈기왕성한 청년은 아니니 뒤로 물러서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복음에 헌신하고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평생을 바쳐도 다 갚지 못할 만큼 크니까요.
권능으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에 참여케 해주신 엘로힘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복음 완성의 그날까지 새벽이슬 같은 청년의 정신으로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아버지 안상홍님 걸어가신 길을 따라서 천국의 보화를 세상에 나누어주자♬”
힘차게 부르는 새노래에 가슴 가득한 열정이 더욱 뜨거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