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한 청년이 심리상담소를 찾았다. 낮에는 잠만 자고 밤에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는 아들을 보다 못해 부모가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자립하여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나가야 할 나이지만 아들에게 삶의 의욕이라고는 없었다.
상담을 통해 그 원인을 살펴보니 부모의 지나친 관심과 간섭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외동아들인 그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철저히 짜 놓은 시스템하에, 필요한 것은 요구하기도 전에 얻었고, 친구까지 엄마의 기준에 맞춰 사귀어야 했다. 스스로 선택할 기회도, 역경을 헤쳐나간 경험도 없기에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를 의존하며 무기력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관심과 사랑으로 착각한 양육 방식, 귀하다고 사사건건 도와주고 무조건 두둔하며 자식을 곱게 키운 대가다. 아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지극한 사랑은 부모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온실 속 화초가 혹독한 비바람을 견뎌낼 수 없는 것처럼, 과잉보호는 자녀를 캥거루족(자립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젊은이), 마마보이 등 나약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과잉되는 과잉보호
저출산 시대에 자녀가 기껏해야 한둘이다 보니 그야말로 금지옥엽이다. 자녀에게 쏟는 관심과 기대도 크다. 뜨거운 교육열과 끊임없이 벌어지는 흉악한 사건·사고 등 삭막한 사회 분위기,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자라왔던 자신과 달리 자녀가 기죽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까지 더해져 부모들의 과잉보호 현상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부모가 자녀의 담임 교사에게 전화해 아이의 짝꿍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바꿔달라고 하는가 하면, 자녀에게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이유로 교사를 폭행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아이에게 입맛에 맞는 점심을 먹이기 위해 보모와 함께 캠핑카를 학교 앞으로 보내어 요리를 시킨 일도 있었다.
자녀가 어린 경우뿐만이 아니다. 부모가 대학생 자녀의 수강과목을 일일이 정해주고, 자녀가 입대한 부대에 전화해 훈련이 가혹하다며 따지기도 한다. 자녀가 힘들어한다며 부서를 바꿔달라고 회사에 요청하는 부모도 있다. 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입사지원자의 어머니가 전화해 “최고의 스펙을 갖춘 우리 애가 왜 떨어졌는지 설명하라”고 큰소리쳐 진땀을 빼기도 했다고.
사실, 자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무조건 잘해주고 싶은 마음을 자제하는 것이 부모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어디까지가 자녀를 위한 길이고, 어디부터가 과잉보호인지 딱 잘라 말하기도 어렵다. 사회복지학사전에는 과잉보호를 ‘부모가 심리적 혹은 신체적으로 해가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을 피하게 하려고 지나치게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경향’이라 정의하고 있으나, 어떤 경우가 ‘심리적 혹은 신체적으로 해가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인지 또 ‘지나치게’의 정도는 어느 정도인지 판가름하기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판단은 오로지 부모의 몫이다. 나의 행동이 과연 아이를 위한 길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사랑의 균형을 맞춰나가야 한다.
자녀 앞가림 막는 과잉보호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웬디 그롤닉Wendy Grolnick은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으로, 12개월 된 아이의 엄마들에게 장난감을 주면서 “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노는 동안 아이 옆에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떤 엄마들은 장난감 사용법을 보여주며 아이의 놀이에 자꾸만 끼어들었고, 어떤 엄마들은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도움이 필요할 때만 도와주었다.
이후, 엄마를 아이로부터 떨어지게 한 뒤 아이들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주자 통제 성향의 엄마를 둔 아이들은 오래가지 못해 흥미를 잃는 반면, 자율성을 지닌 엄마를 둔 아이들은 장난감을 계속 탐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롤닉은 엄마가 아이를 통제하고 간섭하는 성향을 가지면 아이의 타고난 능력과 동기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자녀를 과잉보호하는 부모의 마음에는 ‘얘는 아직 어려서 못할 거야’, ‘혼자 하려면 힘들 거야’라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자녀가 미덥지 않은 것이다. 자녀가 미덥지 않으니 불안과 걱정도 많다. 그러나 자녀가 서툴다는 이유로, 불안하고 걱정되는 상황을 차단하기 위해 자녀가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부모가 나서서 해결해주고 일일이 간섭·통제하는 것은 ‘넌 이런 일을 혼자서 할 수 없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과잉보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주관에 확신이 없어 선택·결정 능력이 떨어지고, 심신이 유약하여 조금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포기하기 쉽다. 나중에는 대인관계, 사회생활도 어려워지게 되며, 나이가 들어도 제 앞가림 못하고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된다.
일부 부모는 자녀가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유대관계가 깊은 것으로 오인해 흡족해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건강한 유대관계는 형성되어야 하겠지만 노년에 캥거루족 자녀 건사하느라 등골 휘는 불행을 면하고 싶다면 과잉보호는 자제해야 할 것이다.
항해사가 아닌 등대가 되어야
양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모가 아이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라서 스스로 어려움을 헤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립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인생에서 키를 쥐고 있는 항해사가 아니라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등대는 배가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되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을 이겨내는 것은 배가 해야 할 일이다.
자녀에게 자립심을 키워주려면 부모에게는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하다. 아이 혼자 씻게 하려면 욕실이 어질러지는 것은 감수해야 하고, 숙제나 정리 정돈을 스스로 하도록 가르치려면 엄마의 수고는 더 커지기 때문. 자녀가 뭔가를 할 때 “빨리빨리”, “좀 제대로 해”, “그냥 엄마가 해줄게” 하며 재촉하거나 간섭하지 말고, 비록 더디고 서툴러도 진드근히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
‘잘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하기보다는 잘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에 부응하려 노력한다. 아이가 실수하거나 아픔을 겪으면 지켜보는 부모는 안쓰럽고 괴롭겠지만 아이에게는 값진 경험이 된다. 넘어질 때마다 엄마가 대신 일으켜 세워주고, 가방이 무거울 것 같아 대신 들어주고, 다리 아프다는 한마디에 업어주면 아이는 자신이 뭔가를 해냈다는 기쁨과 보람을 결코 맛볼 수 없다. 아이가 힘들어하면 격려해주고 잘했을 때에는 아낌없이 칭찬해주자.
일부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려는 생각에 정작 필요한 훈육을 놓치곤 한다. 층간소음 문제로 아래층에서 항의하면 제 자녀 감싸기 바쁘고,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소란 피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묵인하며, 아이가 왕따 가해자가 되어도 차라리 피해자가 된 것보다는 낫다며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등 이러한 태도는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을 심어주는 행위다. 아이의 자율성을 길러주되 도덕성과 규칙은 반드시 지키도록 해야 한다.
새끼가 너무 사랑스러워, 혹 날다가 떨어져 다칠까 봐 새끼를 마냥 둥지 속에만 있게 하는 독수리는 없다. 새끼는 두렵고 무서워도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워야 먹이를 사냥할 수 있고, 창공을 누비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그렇기에 어미 독수리는 때가 되면 모질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게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내, 나는 법을 배우게 한다.
아무리 모성애가 깊은 동물이라도 자녀를 위해 희생은 할지언정 제 앞가림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 키우지는 않는다. ‘자식을 귀히 알거든 객지로 내보내라’는 말이 있듯, 자식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곱게만 키우지 말고 세상의 어려움을 겪게 하여 굳세게 자라도록 단련시켜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몸도 마음도 훌쩍 자라, 부모의 은공에 보답할 줄 아는 듬직한 아들딸이 되어 부모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