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조회 13,199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직분 맡은 자들이 “겸손”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새기면 하나님의 복음이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로부터 이제 막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 식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겸손에 대해 생각해 보고 겸손의 미덕을 갖춘 복음의 일꾼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장 1∼8절

겸손의 중요성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임의로 대하였습니다. 죄인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어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묵묵히 참으셨고 항상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본보이신 겸손이 어떠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겸손하신 하나님의 품성까지도 닮아야겠습니다. 잃어버린 식구를 찾는 데는 품성 부분도 중요한 몫을 차지합니다.

우리 믿음의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벧전 1장 9절). 구원은 회개에서부터 시작되고, 회개는 겸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따라서 구원의 근간은 겸손이라 하겠습니다. 겸손하지 못한 데서 분쟁이 생기고 시기와 미움, 다툼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적을 두지 않습니다.

성경 모든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 있다, 명철하다 하는 사람은 쓰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남보다 우월하다 하는 사람도 잘 쓰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앞서서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진행하지 않고 자기의 방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 역사에 뛰어들려고 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섭리에 맞물려 돌아갈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쓰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같은 미천한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높다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뭔가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그 뜻을 받들어 일을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쓰시니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라도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데 쓰임받는 귀한 그릇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처럼 또한 그 도를 이루어 가는 마음가짐과 행실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장 26∼29절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명철함과 자기 총명함을 내세우는 사람을 즐겨 쓰지 않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을 진행시키고는 “내가 이만큼 했다”는 생각을 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를 더 크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식구 한 분이 제게 “설교 잘하는 목사님도 좋지만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과 오래 지내다 보면 목사님 얼굴에 가려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무척 여운이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설교를 못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 많이 나타나시고 우리 마음속에 더 크게 자리잡으셔야 하는데 목사님만 떠오른다면 이는 큰 잘못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식구들 앞에서 하나님을 비춰 보이는 거울 역할만을 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을 더 크게 보는 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 어떤 경우라도 목회자를 보지 마시고 목회자가 비춰 보이는 하나님을 바라봐 주십시오. 말씀을 전하는 자가 거울 이상의 역할을 한다면 위험한 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 가운데 학식 있다, 명철하다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쓰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쓰이게 되면 그들의 명성에 가려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통해 자기 이름을 더 크게 하려 할 뿐 결코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이름을 심으려고 노력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겠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의 과정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본연의 자세임을 망각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죄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앞에서 이끌고 지도하는 위치라 하더라도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식구들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해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겸손해진 느부갓네살

“…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단 4장 30∼37절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방 나라 왕이기는 했지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게 하나님을 느낄 수 있도록 큰 역사를 여러 번 보여주셨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사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해 주셨고, 또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 결국 그 왕위에서 쫓아내셨으며 겸손한 마음이 그 속에 자리했을 때 지혜와 총명을 다시금 넣어 주시고 왕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자기 능력과 권세로 대국을 건설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짐승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다”는 교만 때문에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 낮아질 대로 낮아졌습니다. 그는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 털처럼, 손톱은 새 발톱처럼 변하고서야 겸손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느부갓네살왕이 “하나님께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낮추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서 하늘의 왕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겸손의 문제는 단지 구약 시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과거에 이어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진리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첫걸음이 겸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복음 일을 하면서 우리도 이런 부분을 주의해야겠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누구를 지명하시든지 이루실 수 있는 일을 맡겨 주신 것뿐입니다. 지역장이든 구역장이든, 전도사든 목사든 어떤 직분이라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시고 지명하시면 그 사람에게는 맡은 직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에 임하자

하나님께 열매 많이 맺기를 구하거나 지혜를 구하는 식구들이 있다면 오늘 먼저 겸손을 실천에 옮겨 보십시오. 나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 은혜 가운데 불러 주시고 이 영광의 자리에 참여케 하신 것만도 감사히 여긴다면 지금부터 평생 형제자매를 위해 종노릇하라 하셔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게 된다면 시온의 축복과 영광은 본인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복음에 임했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 ” 행 20장 17∼19절

“내(바울)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전 9장 19절

사도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당시 특권으로 인정되던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식이 많고 율법에 정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스스로 높은 마음을 품을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것들을 자랑치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행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길을 떠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도 중의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장 5∼6절

교만하면 하나님의 대적이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면 하나님의 모든 도우심이 단절됩니다. 지혜가 있었다면 지혜가 사라지고, 열매를 잘 맺던 사람이라면 열매가 끊어질 것이며, 축복받던 자는 축복이 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장 5~6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인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자가 될 것인지 여부도 “겸손”이라는 두 글자가 좌우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자 한다면 작은 일에서부터 순종하며 겸손하고 겸허한 믿음을 갖도록 합시다. 겸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복음에 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시온을 가득 채우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싶다면, 그리고 지혜와 총명을 많이 받고 열매도 많이 맺고 싶다면 무엇보다 겸손한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때가 되면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복음 일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궂고 험한 일이라도 그 일이 우리 식구들을 위한 일이라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식구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두 다 보고 계십니다. 눈에 안 띄는 궂은 일만 도맡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몰라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에게 열매를 더 많이 주시고 말씀의 능력도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걷는 복음의 길은 하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어야 합니다. 그 길이 가장 정확하고 올바르며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의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가르침을 실천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했을 때 주어지는 축복은 실천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겸손하라 하셨으면 겸손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전도를 비롯하여 모든 복음 일이 형통하게 됩니다. 행함으로 몸소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던 아버지, 어머니의 교훈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겸손해질 때 많은 식구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어 봅시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간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선진인 욥에게도 겸손을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욥 22장 29절

이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겸손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교훈하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장 1∼4절

어린아이들은 권위가 없습니다. 항상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부모가 시키는 대로 따릅니다. 어린아이는 또한 부모를 의지합니다. 어린아이는 무엇을 하든지 항상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조금만 먼 곳에 가더라도 데려다 달라고 조릅니다.

우리도 이런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필요로 해야겠습니다. “나도 이 정도는 할 줄 안다”가 아니라 “내가 비록 이 일을 할 줄 알아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더 은혜로운 방법을 허락해 주신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아름다운 결과가 나올 수 있으니 하나님께 먼저 구해야겠다”는 마음이 어린아이의 마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 하셨습니다. 먼저 간구하고 행하는 것, 그것은 겸손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은혜로운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행하며 겸손을 최대의 미덕으로 여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과 태도로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 일에 충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고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