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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전도

2816 읽음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는 데 있어 간혹 주위 여건이나 상황에 굴복함으로 인해 더 어려운 여건에 처해질 때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한순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상황 논리에 굴복함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믿음이 무너진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내면세계에 충실하며 강한 믿음과 정신력을 소유함으로 능히 어려운 여건을 이겨냄은 물론, 어떠한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전도하는 자세와 하나님을 향한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어느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바쁜 일로 인해 아이를 잠시 교회 식구에게 맡겨 놓고 외출했다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이를 돌봐주던 식구가 자기 아이에게는 값비싼 고급 과자를 먹이고 자매님의 아이에게는 값싸고 맛없는 과자를 먹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소 믿음이 있노라 하던 자매님이었지만 자신의 아이가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만 앞뒤 정황을 따져보지도 않고 마음이 상해 화가 치밀었습니다.

사실, 아이를 돌봐주던 식구는 즐거운 마음으로 과자까지 사다 나눠주었는데 자매님의 아이가 고급 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른 과자로 바꿔주다 보니까 고급 과자는 자기 아이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 그 상황을 보게 된 자매님은 한순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그때까지 배우고 지켜 왔던 형제 우애와 사랑의 미덕을 무너뜨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비단 그 자매님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만약 외적인 조건과 환경에 휩쓸린다면 우리들 역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신앙만큼 위험한 신앙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리는 사람은 어느 한순간에 마귀가 놓아둔 올무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중심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외적인 조건에 관계없이 내면의 세계를 잘 가꾸고 다듬어 가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외부의 논리와 상황이라도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좋은 조건에서는 잘하다가 그런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자포자기하게 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사도 바울의 전도” 정신이 아니라 믿습니다. 어떠한 악조건도 복음에 유익한 환경으로 바꾸어 간 바울의 생애를 이해하며 우리도 그와 같은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장 19∼27절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사도 바울의 자세를 생각하며 우리도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않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과거 출애굽 노정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애굽에서 출발할 때와 광야라는 외적 조건을 접하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이나 믿음의 열정이 사뭇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육십만 명이 넘는 장정들 중에서 외적 환경에 전혀 흔들리지 않은 단 두 명만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전부 중심이 무너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엎드러졌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는 거침없이 불만을 토로하며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고 또 조금이라도 힘든 여건과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중심을 잃고 자신들의 믿음을 무너뜨렸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구름을 조금만 움직이셔도 비를 내리실 수 있고 광야에서 일용할 양식을 비같이 내리실 수 있었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지 못하고 원망, 불평하다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고전 10장 5~11절).

그러나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여호수아와 갈렙만큼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리니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민 14장 8~9절)라고 외치며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기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 또한 내적 의미를 잘 깨달은 사람이었기에 결코 외적 상황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로부터 시험에 들 만한 말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였습니다. 심지어 사단이라는 말까지도 들었습니다. 그가 뭔가 큰 잘못을 범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 16장 21∼23절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충성스러운 베드로는 “주여, 절대 그런 일이 주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누가 주님께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제가 나서서라도 … ” 하면서 의분을 내비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칭찬은커녕 “사단아 물러가라!”는 꾸중을 들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만큼 아끼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뭔가를 교훈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모두 유령인가 하여 배 한편에서 떨며 쳐다볼 때에도 베드로는 용감하게 나서서 여쭈었습니다. “만일 주시어든 저로 하여금 물 위로 걸어가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러나 예수님의 허락을 받고 걸어가던 그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열둘 중에 최고다.”라는 격려의 말씀을 하실 법도 하였지만 오히려 그를 향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꾸지람을 하셨습니다(마 14장 22~33절).

우리들이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목사님께 그런 말을 들어도 맥이 빠질 법한데 예수님께 직접 그런 말씀을 듣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그런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지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외적인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아 천국 열쇠도 받게 되었고 교회의 기초가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장 18∼19절

이제 우리들도 외적인 조건이 내 영혼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만 유익하지 않다면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태산같이 큰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중심이 무너질까 싶어 날마다 자기를 채찍질하며 그리스도 앞에 복종시켜 나갔던 사도 바울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지키는 행위가 선행되어야겠습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긍정적이고 그 마음이 뜨겁습니다. 가룟 유다도,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었던 사울왕도 처음에는 모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중간 과정에서 외적인 요소가 작용하다 보니 그 영향을 받아 모두들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과 어떤 분위기 속에서라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잃어버린 형제자매를 모으는 사명을 받았음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외적인 조건이 변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중심만큼은 결단코 변함이 없어야겠습니다. 또한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열정이 그대로 살아서 영원한 천국까지 갈 수 있는 우리들이 반드시 되어야겠습니다.

상황과 여건을 믿음으로 창출하는 자

사도 바울이 어떤 환경에서도 전도의 상황을 창출했듯이 우리들 역시 예기치 못한 환경을 만나더라도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봅시다.

어떤 자매님은 명절날 시댁에서 음식을 만들다가 “동서, 이거 한 번 먹어 봐.” 하며 입에 넣어 준 음식이 전도와 직결되어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펴놓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와 같이 각자가 처한 환경에 맞추어 전도를 하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다르게 주어진다 하더라도 항상 전도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상황이 전도의 환경으로 보입니다.

어떤 대기업의 총수는 차를 타고 길거리를 가다 보면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널리고 널린 것이 돈 될 만한 것들인데 사람들이 왜 안 주울까 이상하게 생각을 한답니다. “저걸 가지고 이러저러하게 하면 모두 돈이 될 터인데” 하는 생각으로 꽉차 있다 보니 재계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의 총수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복음에 대하여 이러한 안목이 트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저 많은 전도 대상자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으면 합니다.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으니 모두가 전도 대상자들이 아니겠습니까? 환경을 탓하지 말고 환경을 만들어 갈 줄 아는 여러분들이 꼭 되시길 바랍니다.

군대에 입대한 우리 청년 성도들은 일병만 되어도 부대 내부에 소문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짧은 외출, 외박 때 함께 한 군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보면 군인 성도들의 중심이 뜨거움을 알 수 있습니다. 고참병이 전도하는 데 대해 야단을 칠 때면 오히려 고참병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많은 군인들이 진리를 영접하는 은혜로운 일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안 된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복음을 가로막았다면 이제는 바울처럼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도 자유롭게 전할 수 있는 우리들이 다 되어야겠습니다. “어떤 장소에서는 복음이 잘 안 되더라”는 것은 고정관념에 불과합니다. 생각을 깨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불교 국가에도 전파되고, 이슬람 국가에도 전파되고, 심지어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도 이 복음이 더욱 잘 전파되고 있지 않습니까?

설령 주어진 환경이 대대로 유교 집안이요 불교 집안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다 돌이켜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결코 잊지 맙시다. 내 힘으로 돌이키려 하고 나를 의지하여 전도하려고 하니 바깥 상황이 두렵고 “안 된다”는 생각이 자기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정신

그러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어떠한 중심으로 임했는지 살펴봅시다.

“…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장 20∼24절

사도 바울의 전도 정신이 이러했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열매도 주시고 각처에 많은 교회를 세우게 해 주셨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 가운데서 전도의 환경을 만들어 갔기 때문입니다. 결박당하고 옥에 갇히는 일 정도는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옥에 갇히면 거기에서 간수들과 죄수들을 전도하여 회개시켰습니다.

감옥에 가서는 죄수들 앞에서, 왕과 왕족들 앞에 섰을 때는 그들 앞에서,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바울의 입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담대히 흘러 나왔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바울의 전도를 훼방하려 하여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이곳 저곳에 가둬 보아도 감옥이 결코 바울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감옥 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바울의 믿음과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 전부가 전도 터요 인류는 모두 전도의 대상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전도의 환경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만나면 유대인의 생각과 입장을 고려하여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인이 되게 했고, 이방인을 만나면 이방인의 특성과 환경을 복음 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시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이기 때문에 안 될 것이다”는 생각이나 “우상 숭배자요 이교도이기 때문에 안 될 것이다”는 생각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전도에 대해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식 전도라 하니 어떤 식구는 전도 본연의 자세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취미와 오락을 즐기는 곳에 가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전도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도 바울의 전도가 아닙니다. 만약 평소 여건상 전도를 하지 못하던 분이 가족이나 동료로 인해 그런 장소에 가게 되었다면 그 상황 속에서도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사도 바울 전도의 개념입니다.

바울은 자기 일을 하다 보니 관련된 일로 만나는 사람마다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 바울의 전도이고, 직장이나 학교, 군대 등 어느 위치, 어느 입장에 놓이더라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전도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전도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만날 때는 유대인의 처지에서 그들의 동류가 되어 그들을 구원시켰고 이방인들을 만났을 때는 이방인 속에서 또 그렇게 구원시켰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방인들의 제사에 참여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전도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또한 전도하지 않고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만나러 다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심이 흐트러짐 없이 항상 하나님을 향했으므로 전도를 가로막고 그를 해하려 드는 외적인 조건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행 21장 11∼13절

이제는 “사도 바울의 전도”를 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전도 형태가 획일적이었다면,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식구들이 모여 오는 이 시대에는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면서 전도해야 하는 “사도 바울의 전도”가 선포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우리에게는 마지막 예언 성취를 목도하는 것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의 감정과 생각, 자신의 모든 신앙적인 모습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와 의의 면류관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가장 소중한 직무입니다. 직접적으로 전도하러 나서야만 전도인의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직장인은 직장에서, 개인 사업가는 자신의 사업장에서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도에 힘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최고의 사명입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장 1∼8절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의의 면류관과 하늘 영광을 내다봅시다. 결코 주위의 상황이나 논리에 떠밀려가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결에 떠밀려 내려가지만 산 물고기는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상의 조류에 흘러가 버리는 우리가 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의를 지키고 믿음을 지켜 갑시다.

성경 속의 “의인 노아”, “의로운 롯”은 모든 사람들이 주변의 상황에 휘말려 있을 때 항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성경에서 칭송하는 믿음의 선진들이 되었습니다. 소돔성과 고모라성의 화려한 생활 속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휘청거리던 사람들 속에서도 롯은 하나님을 잃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조건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자체를 흩트릴 수 없었고 파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그러했고,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런 점들을 육비에 아로새기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슬기롭게 이겨내고 극복하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바르면 다니엘처럼 포로 생활 중에서도 존귀를 받고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흐트러져 있는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외적인 조건이 조금만 불리해도 그러한 상황에 협상해 버리고 하늘 영광을 놓쳐버리는 불쌍한 영혼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외적인 조건 속에서도 중심을 흩트리지 말고,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움직이듯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항상 따르는 십사만 사천 성도들이 다 되도록 합시다.

주변을 바라보십시오. 세상 땅 끝까지가 우리의 전도 터요, 육십 억 인구 모두가 우리의 전도 대상입니다. 해외는 해외대로, 국내는 국내대로 각자 맡은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서 잃어버린 형제자매를 빨리 찾읍시다.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사도 바울식의 충성스런 전도를 멋지게 해내는 시온의 가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