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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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택해서 사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지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 천국 가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늘 아버지 어머니 기뻐하시는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시온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바라보면 2천 년 전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모세, 아브라함, 노아, 아담과 하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선택의 삶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광야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매 순간 선택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을 소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분초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선택의 삶을 살아가면서 지금 우리는 얼마나 올바른 삶을 선택하여 살고 있는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 제자들의 삶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새해가 밝았다고 세계 곳곳에서 축포를 쏘아 올리고 떠들썩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돌이켜보니 벌써 연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일 년이 하루같이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6천 년 장구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하셔서 구원의 길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그 구원의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라 하셨습니다.

과거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제자들은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장 17~22절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그것으로 생업을 유지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오셔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반응하고 선택을 했습니다.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는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필요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죄악 세상에서 고통하는 인생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구원 주러 오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어떤 유익을 얻자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으라, 이런 길을 걸으라고 지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았던 제자들은 그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좋았습니다. 그 길이 비록 험난하고, 그들 앞에 찬란한 영광보다 가시밭길이 더 많이 놓여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더 좋았기에 그들은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생업의 필수도구인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는 그 음성을 선택하고 따랐습니다. 선택을 참 잘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의 삶에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고 갈등이 있었다 해도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겠나 생각해보십시오. 2천 년 전 베드로가 아니라 2천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오늘 이 시점에서 예수님과 천국에서 함께하고 있을 베드로,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원하는 일, 하고픈 일을 무엇이든 다 하면서 하나님의 품에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이 시대 아버지 어머니를 영접한 우리의 선택이 참으로 올바르고 복된 선택이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높은 직책과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해도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 시간이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것은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합니다. 순간과 찰나를 선택하는 어리석은 삶보다 영원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의 그릇된 선택

시시각각 찾아오는 선택의 시간 속에 조금만 잘못된 선택을 해버리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도 단 한 사람, 선택을 잘못한 이가 있었습니다.

“그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마 26장 14~16절

가룟 유다가 예수님보다 은 삼십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줄 기회를 지금 찾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이런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서 영원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놓쳐버리는 안타까움을 범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얼마나 영광된 직분입니까?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배우고 받아들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보다 재물이 더 탐이 났습니다. 재물을 선택하고 보니 하나님이 그때부터 달리 보입니다. 그리스도를 깨닫고 따라다녔던 요한이나 베드로 같은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가룟 유다는 별반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따라다녀봐도 고생스럽기만 하고, 사람들에게 환영받거나 인기를 누리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이단’이라는 조롱을 받고 “사람이 어찌 하나님이냐”고 훼방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그릇된 선택을 한 가룟 유다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지만 후회는 할지언정 회개는 하지 못한 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 이 순간 가룟 유다는 과연 어디 있을까요? 무엇을 할까요? 세세토록 타는 유황 불 못에서 ‘그때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을까?’ 이렇게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후회하고 있겠습니까?

선택의 시간은 지나버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가운데서도 부자가 죽어 음부에서 고통 중에 후회했지만 결코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선택했던 삶과,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랐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삶을 비교해보십시오. 우리 믿음 생활 또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겠느냐” 하실 때 지체 없이 따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바쁘고 중요한 일들이 있겠지만 그런 일들을 뒤로하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경배함으로 영원한 천국의 축복과 거룩함을 덧입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겠다는 선택을 했기에 매주 시온에 나아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가운데서 매번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선택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을 위한 선택과 영원을 위한 선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좌우편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은 각각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성경의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장 39~43절

아버지께서는 이 두 강도에 대해서 좌편에 있는 강도는 순간을 생각한 사람이요, 우편에 있는 강도는 영원을 생각한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좌편 강도는 군중들의 뜻에 영합하면 혹시나 자신을 살려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그리스도여든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좌편의 강도가 순간만을 생각했다면 우편의 강도는 영원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구원의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영원을 선택한 고로 그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천국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 또한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영원을 바라보았습니다. 순간을 선택했다면 그들도 가룟 유다처럼 세상과 영합하여 그리스도를 배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을 선택했기에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이라 비방하고,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라 한다”면서 돌을 들어 치려 하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 시대 우리의 믿음 생활도 영원을 선택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은 순간을 선택한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영원을 선택하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핍박이 와도, 남들이 다소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영원을 선택했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장 16~18절

보이는 것은 잠깐에 불과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을 선택했다면 성경에 어떻게 되어있든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일요일, 크리스마스를 지키겠으나 우리가 선택한 것은 영원을 위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는 사람의 계명이 아닌 하나님의 계명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닌, 아버지 하나님과 더불어서 어머니 하나님도 존재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준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장 12~25절

순간을 선택하면 가룟 유다가 됩니다. 영원을 선택하면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은 입장이 될 것입니다. 순교를 당할지언정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변함없이 지켜나가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교훈도, 아버지의 가르침도 모두 자녀인 우리들이 영원을 위해서 살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 영원을 선택한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 ‘왜 우리가 이런 핍박을 받아야 할까’, ‘왜 세상은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되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핍박을 물리칠 만한 능력이 내게 없다고 생각하느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로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사람들의 인기와 추앙을 얻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잠깐의 즐거움과 기쁨보다는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순간의 고난과 아픔, 세상 사람들의 질시와 반대를 겪게끔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우리를 불멸의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이 세상에서 잠시 낮추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다가도 순간의 괴로움 때문에 포기해버리는, 데마와 같은 자가 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함께 전도하던 데마가 순간을 선택하여 삶의 방향을 세상으로 바꾸는 것을 보고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딤후 4장 10절). 믿음을 지키려면 영원을 선택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장 36~39절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잠시 잠깐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고 노아도 그러했습니다. 영원을 선택한 삶이 그들에게는 훨씬 더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순간을 선택한 사람들이 바라볼 때는 그들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이 임하면 “저 사람들이 진짜 제대로 산 사람들이었구나”, “올바른 선택을 한 사람들이었구나” 하고 모두가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과 신부이신 아버지 어머니께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오라고 부르십니다(계 22장 17절). 우리도 성령과 신부께 나아왔기에 순간보다 영원을 선택하는 지혜를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배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선택은 올바른 것입니다. 말씀에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선택입니다(계 22장 18~19절). 세상에는 남을 속이고 미혹하는 자도 많고 수많은 함정과 올무가 도사리고 있으나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를 항상 정로로 인도하고 영원을 표준으로 삼아 나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멀어지면 순간과 찰나에 자꾸 미혹당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베드로의 삶은 초라해 보이고, 백성들의 인기와 추앙을 받는 그 시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의 삶은 화려해 보입니다. 그들을 하나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 지구조차 통의 물 한 방울, 저울에 붙어 있는 적은 티끌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을 선택한 자라는 자부심을 가집시다. 우리에게는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더 영화로운 세계가 있습니다. 세세 무궁토록, 영원 세세토록 아버지 어머니와 손잡고 오늘은 북두성으로 내일은 삼성으로, 우주 별세계에서 마음껏 노니는 행복한 시간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천국을 향해 힘차게 달음질하는 시온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