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 넷 중 셋째다.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나는 아빠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열병을 앓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하반신이 마비될 위기에 처했었다. 어떻게든 날 치료하기 위해 논밭까지 판 부모님 덕분에 다리를 절기는 해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이런 딸이 불쌍하고 가여워서 매 한 번 들지 않고 귀하게 키우셨다. 그러나 사춘기를 겪으며 비관에 빠진 나는, 나를 위해 무엇도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을 원망하며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아빠가 나중을 위해 학교는 졸업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그럴수록 내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나를 왜 살렸어? 삶 자체가 불편한데, 공부한다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겠어? 이렇게 살아서 뭐해? 죽어버릴 거야!”
그날 처음으로 아빠에게 뺨을 맞았다. 아빠는 미안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서 나가버리셨다. 당신의 슬픔을 기댈 데 없이 남몰래 삭이시던 아빠. 그런 아빠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일거리를 찾아 제주도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던 아빠가 갑자기 심한 구토 증세로 병원에 몸져누우신 거다. 소식을 들은 엄마와 큰언니가 한달음에 달려갔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간신히 숨 쉬던 아빠는 엄마와 큰언니를 보고는 눈을 감으셨다. 간암이라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 생을 마감할 정도였다면 그간 고통이 여간하지 않으셨을 텐데, 아픈 몸을 이끌고 어찌 먼 제주도까지 가셨을까.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이기에.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나는 상을 치르는 삼 일간 뜬눈으로 지새웠다. 말할 수 없이 슬프고 가슴이 아파서 내내 통곡하며 울어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아빠께 사과는커녕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못 했는데,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셋째 딸 두고 어찌 떠날꼬” 하며 못난 나를 걱정하셨단다.
내가 사회생활도 못 하고 시집도 가기 힘들 거라 여겼던 아빠의 염려와는 달리, 나는 좋은 사람과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그리고 하늘 부모님을 만나 천국을 소망하며, 그곳에서 아빠를 다시 만날 희망에 부풀어 있다.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아빠! 아빠가 우리 아빠여서 행복했어요. 지금도 보고 싶고 그리워요. 고통도 사망도 없는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