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 끝까지

한국 인천 윤현숙

조회 11,340

둘째로 태어나 장녀의 역할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나이 차 많은 언니가 시집간 뒤부터였습니다. 아래로 줄줄이 네 명의 동생을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제 몫으로 남았습니다.

그즈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일터로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살림까지 제 차지가 됐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곧장 바로 아래 동생과 집안일을 분담해 해치우듯 끝내기 바빴고, 열 살 터울 막내는 업어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십 대의 방황은 시간이 없어서라도 못했습니다.

이십 대가 되어서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일은 기본이었고, 그렇게 모은 돈은 동생들 대학이며 결혼하는 데 보탰습니다. 동생들이 자라면서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긴 했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을 대신하려면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습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데도 어딘가 늘 허전했습니다.

‘왜 내가 여기 태어나서 이렇게 힘들게 살까?’

빠듯한 삶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답을 주실 것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선물해준 성경을 읽고부터 하나님 말씀이 좋다는 건 일찌감치 알았습니다. 하지만 깊은 뜻은 몰랐기에 언제나 갈증이 일었습니다. 그걸 해결하려 애먼 종교 서적과 철학책을 뒤적이기도 했지요.

영혼의 근본에 대한 궁금증이 극에 달했을 무렵, 직장 근처 교회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저녁마다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며 인생의 해답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교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성경을 배워봐도 마음속 공허는 가시질 않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3일 동안 새벽 작정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깨닫는,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올린 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들렀는데, 평소 미용실에서 자주 만나 인사를 나누곤 했던 인상 좋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같이 머리를 손질하며 좀 더 친해졌습니다. 이튿날에는 퇴근하고 만나서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그분이 다닌다는 하나님의 교회에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경 말씀을 살피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진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했을 때는 놀랍다 못해 소름마저 돋았습니다. 그동안 일요일에 예배를 봤었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겁니다.

바로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지체 없이 새 생명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마치 천국 같았습니다. 소원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원 없이 살피며 서서히 눈이 뜨였습니다. 영혼 세계의 이치를 알게 된 날에는 엄청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해묵은 의문에 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런 삶을 걸어왔구나.’

하나님을 만나려고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힘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찾을 일도 없었을 테지요.

하늘에서 죄짓고 이 땅에 내려와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인생에게 평생에 걸쳐 단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을 말하라면 그것은 단언컨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참 하나님을 깨닫고 얻은 행복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내 영혼의 부모님께서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려고 희생하셨다는 사실에 예배 때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자 무엇을 해야 할지 선명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땅까지 오셨으니, 그걸 알게 된 지금부터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복음의 사명을 마음 다해 받들고 싶었습니다.

김포로 이사한 뒤 차근차근 꿈을 이뤄갔습니다. 새롭게 맞이한 터전에서 누구를 만나든 하늘 부모님의 사랑이 가슴에 닿기를 바라며 열심히 알렸고, 결혼 후에는 믿음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 정성을 들였습니다. 시온 안에서라면 모든 일을 복으로 여기고 세심하게 하나님의 성전을 가꾸었습니다. 식구들과도 진한 하늘 가족애를 나눴지요. 그런 노력에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결실로 갚아주셨습니다.

시온에 하늘 가족들이 넘쳐났습니다. 교회는 김포의 다른 지역으로 분가했고, 인천의 강화 지역에도 말씀을 전하려는 식구들과 발걸음을 함께하며 저 역시 새로운 복음의 밭을 기경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러다 몇 년 뒤, 강화로 이사했습니다. 두 번째 분가를 이루며 새 장막터가 세워진 강화에는 복 받을 일이 넘쳤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다려온 알곡들이 가득했습니다. 김포에 있을 적부터 식구와 함께 꾸준히 말씀을 전했던 어르신 부부도 수년 만에 하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처음 뵀을 때 어르신들은 개신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만저만 실망한 것이 아니라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말씀 듣기를 좋아하셔서 꼭 성경을 보여드렸지요.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고민하던 어르신들은, 강화에 시온이 세워진 이듬해 유월절을 앞두고 찾아간 날 비로소 하나님을 영접할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며 저희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늘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하늘 자녀로 거듭난 직후, 어르신들이 건네신 한마디였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걸리든 한 영혼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습니다.

40명이 안되는 식구들로부터 시작된 이곳의 복음은, 가을 절기 동안 성전 확장의 축복을 받으면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복음의 현장에 함께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 속에서 사랑을 배우고 순종을 실천하며 하나님만 바라는 중심으로 제 믿음 또한 다져졌습니다.

다이어리에 끼워둔 엽서 한 장이 있습니다. 엽서에는 가슴에 새기고 싶은 글귀를 메모해놨습니다.

「처음 사랑, 끝까지.」

틈틈이 꺼내보며, 하늘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 내 영혼의 근본을 알게 되었던 그 순간의 기쁨을 되뇌곤 합니다.

복음의 길을 걷는 동안 시련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쉽던가요.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영혼들 앞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마음을 왕창 쏟은 것 같은데도 결실이 미미해 조급했던 일도 숱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고비가 지나면 꼭 축복이 따랐습니다. 고된 청춘의 끝자락에 참 하나님을 만났던 그때처럼요.

지금은 하나님만 바라보자는 생각뿐입니다. 믿음의 첫발을 디뎠던 시절의 마음과 같습니다. 결국, 제가 더디 깨닫고 인내하지 못해 힘들어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상기시켜주고 싶으셨던 것도 ‘처음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늘 아버지 어머니를 만났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부족한 게 없었던 처음. 오직 하나님만이 전부여서 그 뜻대로 살겠노라 다짐했던 초심을 잊지 않으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으로 화답하면서, 하늘 부모님을 향한 첫사랑을 끝까지 지켜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