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추억

한국 강릉, 홍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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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텔레비전에 나오는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만화를 볼 생각에 늘 설렜다. 만화 상영이 끝나면 아쉽기 짝이 없었다.

재미있는 만화를 두고두고 볼 방법을 궁리하다가 비디오테이프로 녹화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비디오테이프를 보면 앞부분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막으면 테이프에 원래 있던 내용이 삭제되고 보고 싶은 만화가 녹화됐다.

집에는 내 유치원 재롱 잔치, 볼링 가이드, 해외 영화, 부모님의 결혼식 등 여러 종류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가지고 녹화를 시작했다. 물론 부모님께 허락받은 비디오테이프에만 녹화가 가능했다. 녹화해둔 만화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만화 비디오테이프의 양은 늘었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만화를 한 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비디오테이프가 부족했다. 급기야 허락받은 것 외에 필요 없어 보이는 비디오테이프를 내 마음대로 골라서 녹화하기에 이르렀다.

‘해외 영화는 많이 봐서 내용을 다 아니까 더 이상 필요 없겠지?’

‘볼링 칠 일이 많지 않으니까 가이드 영상은 없어도 되겠지?’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내 재롱 잔치와 부모님 결혼식 비디오테이프까지 손을 댄 것이다. 결국 집에 있는 비디오테이프 대부분이 만화 비디오테이프로 바뀌었다.

얼마 후 엄마가 오랜만에 결혼식 영상을 보려고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재생했다가 만화가 녹화된 것을 보시고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시며 녹화는 물론 더 이상 만화도 보지 못하게 하셨다. 그것도 모자라 만화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몽땅 내다 버리셨다. 그 뒤로 만화도 못 보고 녹화는 꿈도 못 꿨다. 엄마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때 일이 얼마나 철없는 행동이었는지를 알았다. 요즘은 예전처럼 비디오테이프가 아닌 동영상 파일로 결혼식 영상을 남긴다. 가끔 내 결혼식 영상을 보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어린 아들이 재롱을 떨던 모습, 가족과 보낸 즐거웠던 한때, 부모님에게 최고로 멋지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몽땅 사라져버렸으니 엄마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깟 만화 때문에 부모님의 소중한 추억을 없애버리는 잘못은 결코 저지르지 않을 텐데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천국에서는 어땠을까 짐작해본다. 내 좋을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다가 하늘 가족과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하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고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고 부모님을 원망했던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영육 간에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련다. 잃어버린 추억은 되찾을 수 없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보다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