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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9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관용’과 ‘용서’

상대방의 허물을 감싸주고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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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비들은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고 너그러이 용서와 관용을 베풀며 인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저잣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불같이 화를 내며 다투는 것은 아랫사람들이나 하는 상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목소리를 높이는 쪽이 오히려 상전 대접을 받고 있으니 세상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다 보면 상처받고 상처 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한 잘못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다른 사람이 내게 한 잘못은 오래 기억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복수’하고 말 거라는 다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노는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지게 할 뿐이다. ‘anger(분노)’에 한 글자만 더하면 ‘danger(위험)’가 되고, 성냥개비 하나가 온 산을 불태우듯 분노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순간의 분노로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인생의 전부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화를 참지 못해 점점 위험에 처하고 있는 이 시대, 우리 가정에서부터 필요한 건 관용과 용서, 아량과 포용이다.

“그럴 수도 있지!” VS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사람들은 큰일보다 작은 일에 분노할 때가 많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범죄자보다 버스 안에서 실수로 내 발을 밟은 사람에게 더욱 분노하고, 국민의 혈세를 가로챈 공직자보다 자신의 물건을 망가뜨린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더 어렵다.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붉히는 일도 한 걸음 물러서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대부분이다. 화가 난 까닭이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인내심과 포용력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까닭이 내 생각의 기준 탓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사사로운 일들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마음을 넓게 가지면 된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상대방을 납득하기 힘들 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포용력을 발휘해보자.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은 화만 돋울 뿐,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떠한 경우를 불문하고 무조건 이해하고 포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뛰어다니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어른에게 버릇없이 구는데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무조건 싸고도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내가 조금만 참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 내가 배려하여 상대방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이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웃어넘기자.

예를 들어, 배우자가 이따금 신경질적으로 나올 때 ‘왜 저래?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라고 생각하면 충돌이 일어나지만 ‘낮에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 그런 날도 있지. 내가 조금 참고 따뜻하게 대해주자’ 하고 이해해버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가 “그럴 수도 있지”로 바뀌는 순간, 분노는 사그라지고 마음속에 관용이 피어난다.

관용과 포용은 사랑이다

만화가가 꿈인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용돈만 생기면 동네 만화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들어온 만화책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이는 마음에 드는 부분을 한 장 찢어서 주인 몰래 집에 가져갔다. 이후, 주인을 볼 면목이 없어진 아이는 만화방에 가지 않고 찢어온 만화를 보며 몇 번이고 따라 그렸다. 시간이 지나, 아이는 다시 그 만화방을 찾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반갑게 맞아주는 주인의 모습에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점점 담력이 생겨 만화책을 여러 장씩 찢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결국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에게 주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만화가 지망생이지?” 만화방 주인의 관용은 대한민국 만화계의 거장 이현세 작가를 탄생시켰다.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 신뢰를 깨뜨린 사람을 용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용서는 사랑하는 만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가족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면서 가족에게는 인색하게 대하곤 한다. 작은 잘못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지적을 해야 직성이 풀릴 때도 있다. 특히 아이를 대하면서 그런 경우가 많은데, 아이의 실수나 잘못에 지나치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건 삼가야 한다. 아이의 잘못을 두고두고 혼내거나 혹은 방관해 버리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사랑으로 가르치자.

가족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 진심으로 관용을 베풀 수 있을까. 가족을 대하는 내 모습이 타인을 대할 때보다 예민하지 않은지 돌아보고, 사랑하는 만큼 너그럽게 대하자. 이왕 관용을 베풀려면 조건이나 대가 없이,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상처와 앙금을 남기기 전에 그리하자.

서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

셰익스피어는 “남의 잘못에 대해서 관대하라. 오늘 저지른 남의 잘못은 어제의 내 잘못이었던 것을 생각하라”고 했다. 온 세상을 통틀어 실수, 잘못,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완벽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며, 삶은 여러 가지 변수의 연속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를 용서하고 또 용서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동안 나의 크고 작은 잘못을 덮어주고 용서해준 사람을 생각해 보자. 가족, 친구, 선생님, 직장동료 …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범주 안에 있지 않은가. 특히, 가장 많이 용서를 베푼 사람은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부모님께 잘못할 때가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그 허다한 죄를 용서받으며 살아간다. 자식에게 끝없이 주고도 더 주지 못하는 것이 죄라며, 자녀 앞에서는 오히려 죄인임을 자처하는 분이 부모님이다. 그런 사랑을 받아왔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도 용서치 못할 일이 없지 않은가.

성경에서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 비유되어 있다. 일만 달란트는 16만 년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금전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자들이다. 그 어마어마한 죄의 빚을 하나님께서는 거저 탕감해 주셨다. 그러니 나 역시 타인을 용서하고 관용함이 마땅하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셨다.

용서는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고, 허물을 들추어낼 자격이 없다. 그저 서로를 감싸고 용서해주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가족이라도 한없이 미울 때가 있다. 가족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않다면 등을 돌리고 싶을 만큼 분노하고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더러 가족과 등을 돌린 채 남남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미움, 분노, 원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관계가 회복될 여지가 있다면 관용을 베풀자.

누군가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은 독사에 물린 것과 같다”고 했다. 독사에 물렸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독이 온몸에 퍼지기 전에 독을 빼내는 것이지, 나를 문 독사에게 복수하려고 잡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관용과 용서는 내 마음의 독소를 빼내는 일, 결국 나를 위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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