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이 천 리를 가고 단번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言]. 말이 가진 능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말은 가정의 행복까지 자유자재로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 말 한마디로 가족 관계에 금이 가고, 말 한마디로 가족 사랑이 두터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집 식구들이 쓰는 언어를 보면 그 가정이 얼마나 단단하고 화목한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하는 일마다 그 모양이야?” “하루 종일 집구석에서 하는 일이 뭐야?”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말을 안 듣니?” 이렇게 가슴을 할퀴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가정에서 가족애가 싹틀 리 만무하다.
누구나 따뜻한 가정을 갖기 원한다.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 집 안 가득 훈훈한 온기가 돌고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집 안 온도를 높이는 방법은 따뜻한 말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일러를 가동시킨다 한들, 집에 침묵이 흐르거나 가족 간에 차가운 말, 고성과 막말이 오간다면 마음은 냉골에 있는 기분일 것이다.
여러 설문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거의 절반은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이 하루 30분 미만이라고 답했다. 한집에 살면서 서로 바빠 대화할 여유가 없는 것도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더욱 안타까운 일은 채 30분도 안 되는 가족 대화를 유쾌하게 맺지 못하고 불통으로 끝내고 마는 것이다. 그 황금 같은 시간을 가족의 불화를 불러일으키는데 소진하는 것만큼 애석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반드시 대화 시간이 길어야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면 짧은 시간도 충분하다. “난 당신을 믿어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네가 있어서 엄마 아빠는 행복하단다.” 이 한마디 말이 집 안의 실내온도를 높인다. 가정의 분위기를 살린다. 나아가 가족을 살린다.
폭언은 곧 폭력이다
막말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청소년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욕설이 쏟아져 나오고, 상사 혹은 고객의 언어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방송에서조차 거침없이 막말이 오가고, 익명이 보장되는 사이버 세계로 들어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패트리샤 에반스는, “언어 폭력은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물리적 폭력과 달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훨씬 큰 고통을 안겨준다. 희생자는 혼란에 빠지고 자존감이 서서히 무너진다”고 했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거친 언어, 공격적인 말투로 나타내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겉으로는 고분고분할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결코 말하는 이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이 실수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물론 그 실수로 인한 파장이 두렵기도 하겠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게 될 말 때문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 제대로 못해!” “당신이 그렇지 뭐.” “널 믿은 내가 잘못이지.” 이렇게 가슴에 꽂힐 비수 같은 말이 먼저 떠올라 위축되는 것이다.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말로 공격을 당하면 ‘뭐 이까짓 일로 저래?’ ‘자기는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 하고 반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부모로부터 폭언을 듣고 자란 아이는 탈선하기 쉽다. 성인도 폭언 한마디에 쉽사리 흔들리는데 미성숙한 아이들은 오죽할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한 막말은 아무리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도 듣는 이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면 효과는 제로, 아니 마이너스가 된다. ‘가족이니까 듣기 싫은 말도 해주는 거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해주겠어.’ 이러한 의무감으로 가족에게 아무렇지 않게 지적을 하고 스트레스를 준 적은 없는가. 정 지적해야 할 때에는 상대방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최대한 따뜻한 말로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도 사랑과 관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걸 느끼게 되고, 그 따스함이 결국 사람을 변화시킨다.
욕설, 외모를 비하하는 말, 능력을 무시하는 말, 인격을 모독하는 말 등 폭언은 그야말로 폭력이다. 가정을 시들고 병들게 하는 지름길이다. 집 안에 총, 칼, 폭탄 등이 쌓여 있다면 얼마나 살벌하겠는가. 말도 그런 무기가 될 수 있다. 무기를 사용한 대가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막말은 듣는 사람도 피해자가 되지만, 하는 사람도 피해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입에서 나가는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타인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남에게 한 나쁜 말도 자기 스스로에게 한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평생 좋은 말만 하기에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짧다. “짜증 나.” “죽겠어.” “지긋지긋해.” 이런 말들로 얼룩진 삶은 결코 행복으로 이어질 수 없다. 자신의 언어 습관, 가족과 대화할 때의 말투를 한번 되돌아보자.
따뜻한 말 한마디의 위력
아일랜드 더블린의 ‘하페니교’라는 철제 다리 난간에 한 30대 남성이 아슬아슬하게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작정이었다. 그때 다리를 건너던 16세 소년 제이미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가 “괜찮아요?” 하며 말을 걸었다. 소년이 자꾸만 말을 걸자, 남성은 결국 안전한 쪽으로 나왔고 급기야 마음을 고쳐먹었다. 3개월 후, 소년은 자살을 시도했던 남성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아내가 아들을 갖게 되었는데, 아들 이름을 ‘제이미’라 짓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 남성은 아직도 “괜찮아요?”라는 제이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며, 제이미의 말 한마디 덕분에 살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한국 축구의 영웅이라 불리는 박지성 선수는, 무명 시절 다리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홀로 탈의실에 있을 때 “정신력이 훌륭하다. 그런 정신력이라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히딩크 감독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말 한마디에 인생이 바뀐 이가 어디 한둘일까. 따뜻한 말 한마디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죠?” 이 한마디에 가장의 처진 어깨가 펴지고, “당신이 그 어떤 여배우보다 더 예뻐.” 이 한마디에 아내의 주름살이 펴진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사랑해, 우리 아들(딸).” 이 한마디에 부모와 자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분노에 찬 사람을 화에서 건져내기도 한다. 가족이 화가 나 흥분해 있을 때,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래?” “왜 괜히 나한테 화풀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야단이야!” 하며 공격적인 말을 하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과 같다. 그럴 땐 “미안해요.” “당신, 화가 많이 났나 보군요.” “화가 난 이유를 차근차근 말해봐.” 하며 따뜻한 말로 화가 난 데 대해 공감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상대방도 화를 금세 누그러뜨리게 된다.
최고의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옷 입히고, 좋은 학원에 보내주기보다는 좋은 말을 해주는 부모다. 최고의 남편은 많은 돈을 벌어오기보다는 아내에게 따뜻한 말을 해주는 남편이다. 최고의 아내 역시 남편에게 따뜻한 말로 힘을 주는 아내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는 생명력이 있다. 그 위력을 생활 속에서 가족을 향해 발산해보자.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서 동생이 신발을 잃어버리자 누나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야, 넌 네 물건 하나도 잘 챙기지 못해? 도대체 왜 그래?” 이 말을 끝으로 헤어진 남매는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 말은 누나가 동생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홀로 살아남은 누나는 아우슈비츠를 빠져나오면서 이렇게 다짐했다. ‘앞으로는 내 일생에 마지막 말이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말만 하겠다’고.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우리의 삶. 오늘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려보자. 지금 영영 헤어지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말이었는지, 가족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 되어도 좋을 말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