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사랑 수기
잔잔하면서도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용돈이 필요할 때면 부모님께 손 벌리기보다 갖고 있던 물건을 온라인 장터에 팔곤 했다. 중고 거래는 용돈을 벌게 해줄 뿐만 아니라, 안 쓰는 물건을 정리하고 경제관념도 생기게 해주는 등 장점이 많아 보였다. 중고 거래의 매력에 빠진 나는, 겉으로는 다른 수험생들처럼 독서실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중고 거래로 이윤을 남길까?’ 하는 궁리로 여념이 없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다 어느덧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무렵, 경찰서로부터 한 통의 연락이 왔다. 내가 사기를 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의 족적을 되돌아보니 의심 가는 거래가 한 건 떠올랐다. 전말을 파헤친 결과, 물건을 산다고 한 사람이 자신이 직접 돈을 부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송금하게 하고 중간에서 물건을 가로챈 것이었다. 송금한 사람은 물건을 못…
한국 성남, 강민서
아이를 타국에 보내며
얼마 전,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가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으로 역사 탐방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딸아이는 난생처음으로 비행기를 탈 기회를 얻었지요. 출발하는 날, 새벽에 남편이 딸아이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고 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지은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왜 그럴까요?” 딸아이는 긴장하면 복통을 호소하곤 하는데, 아이와 통화해보니 그날도 긴장한 탓에 배가 아픈 것이었습니다. 달리 해결할 도리가 없어, 일단 딸아이에게 식사를 거르고 비행기에 탑승하라고 한 뒤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이가 아픈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게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그렇게 통화한 이후로는 저녁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저녁에 퇴근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더니, 새벽에 공항으로 가는 길에 아이가 그러더랍니다. 안 가면 안 되느냐고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는 하지만…
한국 여수, 마은희
외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준 조카
저에게는 아주아주 이쁜 조카가 있습니다. 조카는 외할머니를 정말 살뜰하게 챙깁니다.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자나 고구마, 감자, 귤 등을 수시로 보내드리고, 맛있는 것 사서 드시라고 일 년에 세 번씩 용돈도 꼬박꼬박 부칩니다. 이런 조카가 작년에 매우 힘든 일을 겪었습니다. 조카는 결혼한 지 오래되어도 아기가 없어 마음고생하다가 겨우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출산 바로 직전에 그만 아기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만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저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조카가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조카는 열 달 동안 배 속에 있는 아기를 금이야 옥이야 기르면서 건강하게 만날 날만 기다렸다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이모. 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 딸이 이렇게 보고 싶은데,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 조카의 엄마는 제 여동생입니다. 사실, 친정엄마와 저는 동생과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진 채로 지냈습니다. 동생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 창원, 이순옥
기쁨 주는 ‘웃는 얼굴’
하루는 현기증이 일며 몸에 힘이 빠지고 메스껍기까지 했습니다. 워낙 체격이 좋은 데다 힘이 없거나 입맛이 떨어진 적이 없었기에, 갑자기 이런 증상이 찾아오니 당황스럽고 걱정됐습니다. 망설이다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찾아간 병원은 예전에 아버지가 진료를 받으시던 곳이었습니다. 의사는 저의 증상에 대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제가 아버지 보호자로 왔던 기억이 나는지 아버님은 잘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외출은 잘 하시는지도 궁금해하며, 워낙 말수가 없고 조용하셔서 집에만 계시면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으니 많이 웃게 해드리라고 일렀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뜨끔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를 웃게 해드릴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날부터 의사의 당부대로 어떻게 아버지를 웃게 해드릴지 고민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거울신경’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우리 뇌에는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행동을 거울처럼 따라 하는 거울신경이 있어서 상대방의 미소를 보면 같이 웃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한국 대전, 서희정
김밥을 싸면서
저는 어릴 때 김밥을 좋아했습니다. 소풍이나 운동회 날이면 엄마가 늘 김밥을 싸주셨지요. 그래서인지 특별한 날에 김밥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엄마가 되었고, 아이의 소풍날 엄마가 해주신 것처럼 김밥을 싸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김밥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전날 장을 봐서 재료들을 손질하고, 소풍 당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햄, 어묵, 당근을 볶고 달걀부침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재료 준비가 끝나 본격적으로 김밥 말기에 도전! 김 위에 밥을 얇게 펴고 재료를 차곡차곡 얹어 말기 시작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손에 힘을 세게 주면 옆구리가 터지고, 힘을 빼면 재료 사이에 공간이 생겨 김밥을 썰 때 속 재료가 쑥쑥 빠져나왔습니다. 시행착오 끝에 적당히 단단하게 마는 요령을 터득해 겨우 시간 맞춰 도시락을 완성했습니다. 아이에게 도시락을 들려 보내고 난 뒤 주방을 둘러보니…
한국 수원, 김유라
긍정적인 말의 씨앗
우리 가족은 행복한 가정 예배를 드린 후 코너에 실린 ‘행복을 설계하는 긍정의 말’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말의 힘에 대해 일깨우는 내용이었지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를 반복해 상대 선수를 이긴 한국 펜싱 선수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경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 선수는 승리할 확률이 없었음에도 극적인 역전을 만들어내 결국 승리했습니다. 그즈음, 일곱 살 아들은 기초 수학을 공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와 남편은 아들의 선생님과 자주 상담했습니다. 선생님은 아들이 이 시기에 기초 수학을 확실히 배워놓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낀 저희는 아들이 학교 수업이 마치면 수학 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그러다 그것이 아들을 압박하는 것 같아서 물건과 동전 등을 이용해 수학을 익히는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풀이 죽어 있는 아들의 모습에 저와 남편은 마음이…
미국 NY 뉴윈저, 록산느
수박쟁이 동생
‘수박 킬러’, ‘수박쟁이’. 제가 동생에게 붙여준 별명입니다. 씨 뱉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수박을 잘 먹지 않는 저와 달리 동생은 수박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동생은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냉장고에서 엄마가 썰어놓은 수박이 가득 든 통을 꺼내 방으로 갑니다. 그리고 통 안의 수박을 모두 먹어치울 것처럼 열심히 먹습니다. 여름이면 그런 모습을 거의 매일 봅니다. 엄마에게 수박을 얼마나 자주 사느냐고 여쭤보니 일주일에 한 통은 꼭 산답니다. 동생이 혼자 먹는 수박 양을 따지면 한 달에 다섯 통은 거뜬히 될 겁니다. 그래도 질리지 않는지, 철이 아닌 겨울에도 “수박 먹고 싶다”는 말을 심심찮게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엄마는 동생이 사랑(?)하는 수박이 냉장고에서 떨어질세라 매일 확인하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여름이면 냉장고에 수박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는 엄마가 진지한 얼굴로 TV를 보고 계셨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싶어 화면을 봤더니 맛있는 수박을…
한국 서울, 홍정은
동생의 달걀 요리
동생이 어렸을 때, 달걀 요리를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엄마는 그런 동생을 위해 우리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동생의 요리가 아무리 엉망이 되더라도 먹어주렴.” 동생이 처음으로 만든 달걀 요리는 약간 설익었습니다. 아무도 선뜻 동생의 요리를 먹지 못하고 있는데 동생이 와서 물었습니다. “어때, 괜찮아?” “그럼. 정말 맛있네.” 엄마는 동생을 칭찬하시고는 우리에게 얼른 먹으라는 눈치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달걀 요리를 먹었습니다. 동생이 다시 한번 요리를 시도했을 때, 엄마는 달걀이 다 익었는지 구별하는 법을 다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새로운 정보에 자신감이 붙은 동생은 이번에는 달걀을 너무 익혀버렸습니다. 동생은 자신이 만든 요리에 만족하며 맛을 보고는 우리 몫도 테이블에 남겨두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웠습니다. ‘제발 이것도 먹으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우리는 엄마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습니다. 엄마는 조금만 먹고 얼른 버리라 하셨고, 우리는 엄마 말대로 한 뒤 남은 것을 쓰레기통 깊숙한 곳에 넣었습니다. 동생이 보고…
미국 GA 애틀랜타, 비앙카
엄마와 딸기
어릴 적 저희 집은 무척이나 가난했습니다. 방 한 칸에 여섯 식구가 누우면 방이 빽빽하게 들어차 돌아누울 공간이 없을 정도였지요. 부모님은 저희 4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의 밭을 빌려 농사지으셨습니다. 하루는 제가 너무 아파서 엄마에게 학교에 결석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엄마는 집에 혼자 있으면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 아파도 결석하지 말라고 하시며 저를 떠밀 듯 학교로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걸어 학교에 도착한 저는 아파서 책상에 엎드려 있었고, 그 모습을 보신 선생님은 집에 가는 게 낫겠다며 저를 집으로 보내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다시 두 시간을 걸어갈 것을 생각하니 그냥 참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차라리 양호실에서 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상태는 점점 나빠져, 하교 시간이 되어도 일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아셨는지 엄마가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학교에 오셨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집주인 아주머니께…
한국 구미, 박은자
초코우유
남편이 퇴근길에 바나나우유를 사 왔습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가끔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애들 고기 먹게 외식 좀 시켜줘요” 하면 “셋이 먹고 와” 하며 전화를 뚝 끊어버릴 정도로 무뚝뚝한 남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속상한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아이들 먹으라고 과자, 호떡, 아이스크림 등 군것질거리를 종종 사 오곤 합니다. 사실, 바나나우유는 아이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우유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해서 사 온 거라 다른 말은 못 하고 “골고루 사 오면 좋은데, 애들은 초코우유나 딸기우유 좋아해요” 하며 에둘러 힌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도 남편이 계속 바나나우유를 사 오는 바람에, 바나나우유는 본의 아니게 늘 제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큰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초코우유가 먹고 싶어요. 다음에는 초코우유 사 오시면 안 돼요?” 저는 다음 날 사주겠노라 하고는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큰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엄마,…
한국 서울, 홍선옥
아빠의 아픈 손가락
나는 딸 넷 중 셋째다. ‘셋째 딸은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나는 아빠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열병을 앓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하반신이 마비될 위기에 처했었다. 어떻게든 날 치료하기 위해 논밭까지 판 부모님 덕분에 다리를 절기는 해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이런 딸이 불쌍하고 가여워서 매 한 번 들지 않고 귀하게 키우셨다. 그러나 사춘기를 겪으며 비관에 빠진 나는, 나를 위해 무엇도 아끼지 않았던 부모님을 원망하며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아빠가 나중을 위해 학교는 졸업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그럴수록 내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나를 왜 살렸어? 삶 자체가 불편한데, 공부한다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겠어? 이렇게 살아서 뭐해? 죽어버릴 거야!” 그날 처음으로 아빠에게 뺨을 맞았다. 아빠는 미안해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서 나가버리셨다. 당신의 슬픔을 기댈 데 없이 남몰래 삭이시던…
한국 진주, 하정오
참 잘했어요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한 아이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들어왔다. 유모차에 앉아 있는 아이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반질반질해 저절로 눈길이 갔다. 아이를 바라보다 손목에 뭔가 찍힌 흔적을 발견했다. ‘참 잘했어요’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 같았다. “얘야, 손목에 찍힌 게 뭐니?” 호기심에 물었더니 아이 엄마가 대신 대답했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찍어준 도장인데, 씻길 때 지우려고 하니 울고불고 야단이어서 그 주위는 못 씻겼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흔적이 남아 있네요.” 엄마가 씻겨줄 때 칭찬 도장이 지워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이 모습이 그려져 웃음이 났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동물도 칭찬받으면 기뻐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더할까. 그리고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하루에 몇 번이나 칭찬했는지. 그동안 칭찬에 참 인색했던 것 같아 반성하게 됐다. 돈이 드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아내가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도…
한국 성남, 최석휘
사랑의 힘으로 자식을 이기는 엄마
설거지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친정’ 발신자만 봐도 용건이 짐작됐다. 엄마가 우리 집 반찬거리를 챙겨주려 전화하신 게 틀림없었다. 먼저 안부 전화 드릴걸. 죄송함이 밀려왔다. 1남 5녀 중 다섯째인 나는 마흔이 넘었지만, 엄마에게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막내딸이다. 남동생은 아들이라 든든하신지 엄마는 나를 더 막내 대하듯 하신다. 휴대폰을 들어 아이처럼 “엄마” 하고 불렀다. 내 추측이 맞았다. 엄마는 전날 있었던 집안 행사 때, 멀리서 이모와 외삼촌들이 다녀가면서 과일과 고기 등 이것저것 먹을 것이 많이 남았다며 가져가라고 하셨다. 다음 날 오후, 오랜만에 친정으로 향했다. 대문을 들어서는데 뒷마당에서 연기가 났다. 연기를 따라 가보니 아궁이에서 사골을 우려내는 중이었다. 불러도 대답 없는 엄마를 찾아 집 안으로 들어서자 엄마는 부엌에서 나를 반기셨다. 엄마는 지난가을에 주워놓은 도토리로 묵을 만들고 계셨다. 묵을 만들려면 도토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빼고 말려서 빻아야 한단다. 그 가루를…
한국 구미, 이수자
돌아온 신발
외할머니는 항상 내게 주고도 더 주고 싶어 하신다. 초등학생 때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책상을 선물해주시더니 중고등학생 때는 교복비를 보태주셨다. 대학생이 되어 자취를 시작하자 각종 반찬을 만들어 보내셨다. 그러고도 늘 필요한 것 없냐고 물으셨다. 몇 년 전 추석에도 할머니는 구두를 선물해주셨다. 이모와 사촌 동생까지 대동해, 유행하는 디자인이면서도 내게 잘 어울리는 것을 고르고 골라 사주셨다. 연휴가 끝나고 자취방으로 올라오던 날, 할머니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터미널까지 나와 배웅해주셨다.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품고 버스에 탔는데 무언가 허전했다. 방금까지 들고 있던, 할머니가 사주신 구두가 없었다. 할머니께 말씀드리자니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이모한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이모는 당황하며 일단 터미널에 가서 찾아보겠다고 했다. 혹시나 해서 터미널 사무실에도 문의했는데 “구두 같은 건 안 보인다”는 대답뿐이었다. 이미 출발한 버스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발만 동동거렸다.…
한국 안양, 오진휘
효도란
요 며칠 오른쪽 손목이 좀 아팠습니다. 괜찮아지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날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손목 보호대를 하고 온찜질을 하며 그냥저냥 버티고 있는데, 그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는지 중학생인 두 딸이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밥 먹은 후 설거지는 기본이고 둘이 번갈아 가며 집 청소까지 했습니다. “엄마, 머리는 제가 감겨드릴게요. 아픈 손 자꾸 쓰면 안 돼요” 하며 초등학생인 막내아들까지 거들었습니다. 한번은 화장실이 지저분한데 청소할 엄두가 나지 않아, “청소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더니 큰딸이 자기가 하겠다며 청소 방법을 물었습니다. “먼저 세면대와 변기 구석구석에 세제를 뿌리고 수세미로 닦아. 변기 안은 긴 솔로 깨끗이 문지른 다음 물로 헹구면 돼. 슬리퍼는 작은 솔로 문질러서 닦고.” “네, 엄마.” 얼마 후, 딸이 청소를 다했다고 해서 문을 열어보니 화장실이 깨끗했습니다.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딸아이가 언제 이렇게…
한국 서울, 장순향
첫 월급
휴대폰 진동 소리에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월급이 입금됐다. 내 인생 첫 월급이라 무척 기뻤다. ‘진짜 돈 들어온 거 맞아? 이걸 어떻게 쓰지?’ 부푼 가슴을 안고 은행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첫 월급이니 내가 쓰기보다는 지금까지 나 땜에 희생하신 어머니께 드리자.’ 현금으로 인출해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가 엄청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한동안 봉투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미안하다. 해준 게 없어서 너무 미안해.” 예상과 전혀 다른 어머니의 반응에 당황했다. 왜 미안하다 하시는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대견스럽다. 너도 이제 어른으로서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야 된다니, 마음이 짠하구나. 엄마는 아들 마음만으로도 너무 기뻐. 첫 월급은 너를 위해 쓰렴.” 어머니는 봉투를 돌려주셨다. 나는 억지로 봉투를 어머니 손에 쥐여드렸다. 며칠 후,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에 웬 정장 한 벌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나 입으라고 사 온 거라…
한국 성남, 김선우
예쁜 마음, 감동적인 말
여덟 살인 큰아들은 겁이 많습니다. 자다가 화장실에 갈 때나 물을 마시러 갈 때면 꼭 아빠나 엄마를 깨워 대동해야 하지요. 그런데 하루는 아들이 새벽에 일어나 혼자 화장실에 가는 소리가 났습니다. 웬일로 혼자 가나 싶어, 귀를 기울여 머릿속으로 동선을 따라갔습니다. 잠시 후, 아들은 화장실 문까지 닫더군요. ‘어? 아들이 아닌가?’ 의아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습니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역시나 큰아들이었습니다. “솔아. 왜 문을 닫았어? 안 무서웠어?” “물 내리는 소리에 가족들이 깰까 봐 닫았어.” 아들의 말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방에 들어가 잠자리에 누워 아들을 안아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에 엄마가 감동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저녁 식사 후 정리를 하는데, 작은아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제가 일 끝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인 둘째는 제가 집안일을 마치면 함께 잠자리에 들거든요. 그날은 많이 피곤했는지 “엄마, 그것만 하면 잘 거야?” 하고 몇 번이나 물었습니다.…
한국 의정부, 정은영
우리 아빠는
결혼 후 맞은 첫 명절, 친정에 갔을 때였다. 방에 있는데 거실에서 아빠와 남편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방에 들어온 남편에게 물었다. “아빠랑 무슨 이야기 했어요?” “이런저런 정치 이야기 했어요.” “아빠가 정치 이야기도 하셔요?” 신기했다. 아빠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다시 돌아온 명절, 엄마와 내가 목욕탕에 가면서 아빠와 남편만 집에 남게 됐다. 아빠는 쉬는 날이면 방에서 TV를 보시거나 운동하러 나가시기 때문에 둘이 따로 시간을 보낼 거라 생각했다. 두어 시간 뒤에 집에 돌아가니 거실 테이블에 장기판이 놓여 있었다. 남편은 첫 판에서 한 번 이기고, 나머지 두 판은 참패했다며 아빠의 장기 두는 실력을 칭찬했다. 어릴 때부터 집에 장기판이 있었지만 그 주인이 아빠인 것도, 아빠가 장기를 잘 두시는 것도 나에겐 금시초문이었다. 남편은 아빠가 좀 무뚝뚝하지만 말씀하시면서 웃는 모습이 인자하고 멋있다고 했다. 가만 생각하니 아빠와…
한국 안양, 탁진슬